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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9%, 군인 10%가 귀화인 … 무늬만 단일민족

중앙선데이 2013.07.14 01:28 331호 26면 지면보기
단군의 표준영정. 몽골 침략기와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단일민족론은 우리 민족이 단군의 후손이란 주장에 바탕을 뒀다. [중앙포토]
고려가 건국된 지 100년이 될 무렵, 제8대 현종(顯宗·992~1031년, 1009~1031년 재위)이 즉위한다. 현종은 신라계 출신 왕족 안종(安宗)과 그 조카 헌정왕후(경종의 비)의 불륜으로 태어난 국왕이다. 안종이 불륜을 범한 죄로 경남 사천에 유배되자, 현종은 유배지에서 지내다 안종이 숨지자 개경에 온다. 헌정왕후와 자매 사이인 헌애왕후는 경종의 비로서, 유명한 여걸 천추태후다.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모후가 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의 불륜으로 낳은 아들을 병약한 목종의 후사로 왕위에 앉히기 위해 왕위 계승 서열상 적자인 현종을 강제로 출가시켜 지금의 북한산 신혈사로 내친다. 그것도 모자라 여러 번 현종을 살해하려 하나 실패한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점령되자, 공주·전주·나주로 피난을 한다. 피난 도중 국왕의 체통에 손상을 입을 정도로 온갖 수모를 당한다.

고려사의 재발견 귀화인 수용과 천자국체제

고려의 학문을 융성케 한 유학자 최충(崔沖)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현종을 ‘간난비운(艱難非運·죽도록 고생하고 억세게 운이 없음)’의 군주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거란의 침입을 물리쳐 붕괴 직전의 고려 왕조를 일으켜 세운 ‘중흥(中興)의 군주’라고 평가했다. 오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현종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에 눈을 돌려보기로 한다.

“거란의 수군(水軍)지휘사로 호기위(虎騎尉)의 벼슬을 가진 대도(大道) 이경(李卿) 등 6명이 내투(來投·귀화)했다. 이때부터 거란과 발해인이 귀화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고려사』 권5 현종 21년(1030) 5월)
왜 현종 때부터 거란과 발해인들이 대거 고려로 귀화했을까? 현종 20년인 1029년 9월, 거란 장군 대연림(大延琳)이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을 세운 게 도화선이 됐다. 발해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인 대연림은 고려 침략을 주도한 거란 성종(聖宗)이 병약해(1031년 사망) 거란 조정에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흥요국을 세웠다. 거란의 불안한 정세로 그동안 거란의 지배를 받아온 발해와 거란 계통의 주민들이 고려에 귀화하기 시작한다. 발해·거란인들의 고려 이주는 발해가 멸망(926년)한 10세기 초에 시작됐지만 현종 때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이때부터 금나라가 건국(1115년)되는 12세기 초까지 수많은 이민족 주민들이 고려에 귀화한다. 그런 점에서 1030년(현종 21) 이민족의 대거 귀순은 고려의 주민 구성은 물론 고려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상징적인 사건이다. 다음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민족=단군 후손’ 주장이 단일민족론 근거
고려 건국 후 12세기 초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에 귀화한 주민과 종족은 크게 한인(漢人)과 여진·거란·발해 계통 등 네 갈래로 나뉜다. 가장 많이 귀화한 주민은 발해계로서, 38회에 걸쳐 12만2686명이 귀화했다. 전체 귀화인 가운데 73%를 차지한다. 발해국이 멸망한 결과다. 그 다음으로 많은 귀화인은 여진계 주민으로 4만4226명에 달한다. 거란계 주민은 1432명이 귀화했다. 이들은 거란의 피정복민으로 억압을 받아오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나 거란의 내분을 틈타 고려에 귀화했던 것이다. 한인(漢人) 귀화인은 송나라는 물론, 송나라 건국 이전의 오월·후주 등 오대 국가의 주민들이 포함돼 있다. 모두 42회에 걸쳐 155명이 귀화했다. 고려에 귀화한 이민족 주민의 총수는 약 17만 명으로, 12세기 고려 인구를 200만 명으로 추산한 『송사(宋史)』의 기록에 근거할 때 결코 적지 않은 비율(8.5%)을 차지한다(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많은 이민족이 유입된 경우는 기록상 고려 외에 달리 찾을 수 없다. 또 다른 예를 들기로 한다.

서울 사직공원에 있는 단군성전. [중앙포토]
고려 태조 19년(936) 9월 지금 경북 선산의 일리천(一利川)에서 후백제 신검(神劍)과의 마지막 후삼국 통일전쟁에 동원된 고려군은 모두 8만7500명이다. 이 가운데 ‘유금필(庾黔弼) 등이 거느린 흑수(黑水)·달고(達姑)·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경기병(勁騎兵) 9500명’이 포함돼 있다(『고려사』세가 태조 19년 9월조). ‘제번(諸蕃)’의 군사는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군에 편입된 여진 계통의 이민족 병사들이다. 전체 군사의 10%가 넘는다.

귀화인의 비중 문제를 떠나 고려 왕조가 다양한 종족·국가 주민들의 귀화를 받아들인 사실은, 우리 역사의 특징 중 하나로 전가의 보도처럼 거론돼온 단일민족론을 재검토할 근거가 된다. 이민족의 고려 귀화에 최초로 주목한 학자는 손진태(孫晉泰·1900년생, 납북)다. 그러나 그는 고려 시대 이민족 귀화 현상에 대해 “한민족의 혈액 중에 만주족·몽고족·한족(漢族) 등의 혈액이 흘렀으나, 오랜 역사를 지남에 따라 우리 민족의 피는 완전히 한국적 피로 변화했다”고 했다(『조선민족사개론』 1946년, 44-45쪽). ‘단일민족론’을 주장한 최초의 학자인 손진태는 이민족의 고려 귀화를 예외적인 현상으로 규정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일민족론은 무엇인가? 손진태의 주장이다.

“조선사는 조선민족사로서, 유사 이래 동일 혈족(血族)·동일 지역·동일 문화를 지닌 공동 운명 속에서 공동의 민족투쟁을 무수히 감행하면서 공동의 역사생활을 했다. 이민족(異民族)의 혼혈(混血)은 극소수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국민은 민족이며, 민족사가 곧 국사이다. 이 엄연한 역사 사실을 무시하고 조선 역사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손진태, 『조선민족사개론』, 3쪽)

단일민족은 동일한 혈족(피붙이)·지역·문화를 가진 역사공동체다. 그는 혈족이 단일민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봤다. 위 글에서 이민족의 혼혈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단서를 단 것도 그 때문이다. 이병도 박사도 단일민족론을 제기한다(『국사와 지도이념』 1953년).

이민족 받아들이며 독자적 천하관 형성
단일민족론의 원류는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년)다. 이 책에 따르면 “부여·비류국·신라·고구려·옥저·예맥의 임금은 누구의 후손인가? 대대로 단군을 계승한 후예다”라고 했다. 몽골의 침략을 체험한 그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했다. 일제 식민지배를 목전에 둔 한말 지식인들도 우리 역사에서 단군을 시조로 한 혈연공동체를 강조한다. 단일민족론은 여기에서 기원하며, 손진태는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단일민족의 중요한 기준을 피의 순수성으로 본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주관적이다. 또 다른 기준인 지역과 문화의 동질성도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다. 고유문화도 외래문화를 수용, 융합해 새로운 문화로 창조된다. 변화하지 않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종족이 고려 왕조에 귀화한 사실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풍습이 고려에 유입돼 새로운 문화, 사회체제로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단일민족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는 896년 궁예에게 귀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肅愼)·변한의 땅에서 왕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고려사』 태조 총서)

신라 쇠망기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세조와 궁예 등의 영웅들이 조선(고조선과 한사군)·숙신(말갈과 발해)·변한(한반도 남부) 지역을 아우르는 통일왕조의 건설을 구상한 증거다. 이들 지역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어 특정 민족보다는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통일국가’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그런 꿈이 고려 왕조의 건국 이념에 반영되어 있다. 한반도 최초의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지향한 고려의 의지가 대륙 정세의 변동으로 나타난 수많은 이민족의 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고려 왕조는 이민족 귀화인들을 다양한 층위로 편제시켜, 고려의 신민(臣民)으로 삼고 그들의 거주지를 고려의 번병(蕃屛), 즉 울타리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건 고려와 주변 종족을 중심과 주변, 즉 천자와 제후관계로 삼으려는, 종번의식(宗蕃意識)에 기초한 고려적인 천하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는 고려 왕조가 천자국(황제국) 체제를 갖추는 동력이 됐다. 이런 국가체제에서 ‘단일민족론’이 수용될 수 있었을까?

단일민족론은 고려 왕조의 국가 성격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거나, 한말에 근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강조한 선험적이고 관념적인 역사인식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단일민족론의 기준인 동일한 핏줄·문화·지역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화·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이 고려 역사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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