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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힐 신고 24분 내내 으르렁거리는 그녀

중앙선데이 2013.07.14 01:31 331호 27면 지면보기
하정우가 등장하는 영화라면 다른 일정을 미루고서라도 영화관을 찾는다. ‘베를린’ ‘범죄와의 전쟁’ ‘황해’ 등등 나오는 작품마다 상당한 재미와 작품성이 보장된다. 하루키 소설이 그렇다. 평단에서 포즈와 허세의 작가로 폄하받으며 등장했던 그였지만 30여 년 작품 이력이 쌓이는 동안 신간이 나오면 일단은 읽어줘야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 언제나 그의 소설은 내밀한 재미와 더불어 현실의 상공을 아련히 벗어나게 만들어 준다.

[詩人의 음악 읽기] 하루키 소설에 흐르는 피아노<상>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역시 출간 즉시 대량판매로 화제만발이다. 읽는 내내 ‘이 양반이 젊은 시절로 되돌아갔군’ 하는 느낌이 들었다. 『상실의 시대』나 『태엽 감는 새』에서 마주쳤던 공허하고 단절된 개인을 또 만난다. 밉지 않은 허세도 여전했다. 재즈 피아니스트의 입에서 플라톤과 헤겔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나오고, 상당한 감상 체험이 쌓여야 존재를 알 수 있는 셀로니오스 몽크의 재즈곡을 어린 주인공이 줄줄이 꿰찬다. 그렇지만 이름에 색채가 없다는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의 내면에 어쩔 수 없이 동화된다. 가령 이런 말을 하니까.

‘사람의 마음과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Neil Wilder/Observer
클래식 음악에도 트렌드 혹은 유행현상이 있을까. 가령 중국계 젊은 피아니스트 유자 왕(사진)의 경우는 어떨까. 최근에 내한공연도 가졌던 터라 그녀에 대한 보도가 쏟아져 나왔는데 대부분 10㎝ 넘는 킬힐을 신고 초미니 스커트 차림으로 연주했다는 내용이다. 활동 근거지 미국에서도 그런 이례적인 차림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 모양이다. 연주자의 패션이 음악 이상으로 관심을 모으는 세태가 이제는 더 이상 문젯거리가 아니다. 바야흐로 셀레브리티의 시대니까. 그런데 만일 그런 식의 보도부터 접했더라면 내 경우 유자 왕을 놓쳤을 확률이 높다. TV 혹은 유튜브 스타로군, 하고 휙 지나쳐 버렸을 테니까.

그러나 정말로 진짜로 유자 왕의 연주를 듣고 깜짝 놀랐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2010년 도이치그라마폰에서 ‘콜렉터스 에디션’ 두 세트를 출시한 바 있다. CD 111장으로 구성된 모음집은 그야말로 별들의 잔치여서 그 속에 끼어 있는 신인 피아니스트 데뷔 음반에까지 관심이 미칠 수는 없었다. 유자 왕의 쇼팽 피아노 소나타 제2번 3악장 ‘장송행진곡’으로 유명한 그 연주를 접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꼭꼭 씹어 삼키듯이, 거칠고 다이내믹하게, 무엇보다 아름다운 쇼팽을 거부하겠다는 듯이 진폭을 크게 하면서 밀어붙이는 저런 식의 쇼팽 연주는 처음 들어본다. 드라마가 있는 연주다. 저렇게 모든 디테일에 에너지를 왕창 써버린다면 곡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을까. 하지만 유자 왕은 24분 내내 완벽하게 자기 스타일로 곡 전체를 요리했다. 거칠게 으르렁거리는 쇼팽이라면 일찍이 이보 포고렐리치가 있었다. 곧장 같은 곡을 찾아 들어봤다. 유자 왕에 비한다면 차라리 순한 양이다. 거의 피아노를 때려 부셔야 하는 4악장 피날레 프레스토에서나 이보 특유의 패기가 돋보인다고나 할까.

36세의 공허한 독신 엔지니어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로 이루어지는 하루키 신간소설 완독이 꽤 여러 날 늦추어졌다. 몇 페이지를 읽다가 유자 왕의 연주를 다시 들어보고 또 몇 페이지 읽다가 마우리치오 폴리니 연주를 비교해 듣는 식. 새삼 느꼈는데 폴리니는 쇼팽 연주의 기준점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의외로 무난했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1961년 녹음, 그의 나이 74세 때의 연주는 흥겹고 평온하다고 할까. 유자 왕과는 완전히 대척점의 연주였다. 그 우아함에 반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라질 여류 기오마르 노바에스도 비교 시청해 봤는데 그녀의 쇼팽이 지나치게 고답적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쇼팽 명인이라면 바르샤바 출신의 옛 인물 비톨드 말쿠진스키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책에선가 그의 연주를 폴란드 사투리라고 표현한 것을 읽었는데 과연 그런 것 같다. 청자의 감흥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연주한다는 느낌을 말쿠진스키는 안겨준다.

약속을 많이 취소해야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쇼팽 연주를 탐구(?)하면서 동시에 친구까지 만날 방법은 없다. 어마어마한 독서량과 집필량을 보이는 인간들은 대체 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며 살까. 유자 왕의 거친 쇼팽에 대한 매혹에서 끝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하루키의 이번 소설 속에는 리스트 피아노 모음집 ‘순례의 해-스위스’ 편, 그중에서도 ‘르 말 뒤 페이’가 무척이나 반복해 등장한다. ‘전원 풍경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는 의미의 그 곡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쓰쿠루의 벗 하이다가 전해준 라자르 베르만의 연주도 있지만, 핀란드로 찾아간 주인공에게 옛사랑 에리가 들려주는 알프레트 브렌델의 상반된 연주 또한 관심을 떨칠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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