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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이펑, 입헌군주제 외치다 ‘황족내각’으로 개혁 찬물

중앙선데이 2013.07.14 01:49 331호 29면 지면보기
섭정왕 짜이펑의 권력은 장남인 마지막 황제 푸이(왼쪽 넷째 아이)와 마지막 황태후인 융유태후(왼쪽 여섯째)로부터 나왔다. 1909년 봄, 베이하이(北海). [사진 김명호]
청(淸) 제국은 만주 귀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와 건립한 왕조였다. 말 안장에서 날을 지새우며 약탈로 먹고살던 민족이다 보니 인구도 적고 문화수준도 낮았다. 인재의 결핍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정치적 난제에 봉착할 때마다 한족(漢族) 사대부들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30>

중원(中原)을 차지하기까지, 한족 지식인들의 덕을 톡톡히 봤지만 경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문화는 수용해도 피가 섞일까 봐 노심초사했다. 만주 귀족이나 황실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다못해, 만주에서 데리고 나온 개(犬)들도 지들끼리만 어울리게 했다. 유럽인들이 상전처럼 모시던 명견을 똥개 취급했다. 개국황제 황태극(皇太極)의 대만주주의(大滿州主義)가 만주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이처럼 엄청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족 출신 인재들을 중용했지만 절대 믿지는 않았다. 군대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매달 받는 봉급도 만주인들과는 차이가 컸다. 만주족 사병이 한족 군관보다 더 많이 받았다. 자금성 구석, 한족 관원들은 얼씬도 못하는 밀실(密室)에 만주족 고관들만 수시로 보라고 적어놓은 강희제(康熙帝)의 유훈이 있었다고 한다. “한족 관원들을 신임하지 마라. 이용만 해라.”

18세기 중엽,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청 제국의 군사력은 바닥이 났다. 이어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자 민족정책을 대폭 수정했다. 지방의 군 지휘관들을 한족으로 교체했다. 이한제한(以漢制漢), 한족 관리들에게 난의 진압을 위임했다. 모병과 군비까지 떠넘겼다. 군·정의 실권이 태평천국을 평정한 한족 출신 지방세력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후난(湖南) 출신 쩡궈판(曾國藩·증국번)이 이들을 대표했다. 군대는 만주황실과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쩡궈판 사후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이 군권을 장악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황실이 군권을 회수하는 듯했지만 신군을 설립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해군대신 짜이쉰은 미국, 특히 뉴욕을 좋아했다. 제27대 미국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짜이쉰이 올 때마다 환대했다
전국에 널려 있던 8만8000명의 신군 중 7만여 명이 위안스카이가 훈련시킨 북양군(北洋軍)이었다. 북양신군은 보통 군대가 아니었다. 위안스카이의 초빙을 받은 독일군 장교들에게 호된 단련을 받은 최정예였다. 북양군은 자신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위안스카이는 알아도 청나라 조정은 알 바가 없었다. 서태후에서 짜이펑으로 이어지는 만주세력은 쩡궈판과 리훙장을 계승한 위안스카이의 상대가 못됐다. 그래도 청 제국은 여전히 만주 귀족들의 천하였다.

개혁, 말은 좋지만 성공한 사례가 극히 드물다.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며 온갖 칭송을 받던 개혁가들 거의가 사람들 머리만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혁명가들도 마찬가지다. 한결같이 희극이 가미된 비극을 연출하며 삶을 마감했다.

섭정왕 짜이펑도 위안스카이를 내쫓자 개혁을 서둘렀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던 사람답게 신정내각관제(新訂內閣官制)를 반포했다. 각료 13명 중 만주황족이 7명이다 보니 다들 “황족내각(皇族內閣)”이라고 불렀다. 군·정 대권을 만주족들이 장악했다.

황족내각이 출범하자 짜이펑을 지지하던 입헌파들은 연일 불만을 쏟아냈다. 10년 전, 서태후를 축출하고 입헌군주제를 실행하려다 실패했던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가 특히 심했다. “섭정왕은 배신자다. 입헌에 관심이 없다. 입헌을 구실로 황족집권을 도모했다. 비극을 자초할 테니 두고 봐라.”

짜이펑의 개혁은 황실의 보존을 전제로 했다. 한계가 있다 보니 믿을 건 혈육밖에 없었다. 짜이타오(載濤·재도), 짜이쉰(載洵·재순), 짜이쩌(載澤·재택) 등 친동생 3명을 육군대신과 해군대신, 탁지부(度支部)대신에 임명했다. 모두 20대 초반이었다.

육군대신 짜이타오는 군대와 거리가 멀었다. 경극에는 조예가 남달랐다. 노모가 병중일 때도 경극배우들과 노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문병 온 형 짜이펑에게 유명 배우가 배탈 났다며 근심할 정도였다. 연병장 사열대를 무대로 개조하고 노래 잘하는 병사들을 우대했다. 3년 후 혁명이 일어나자 융유태후가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짜이타오와 진압대책을 상의했다. 짜이타오는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전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하는 건지 모릅니다.”

해군대신 짜이쉰은 쇼핑광이었다. 외국해군 시찰을 이유로 국내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어린 조카가 퇴위하고 형이 섭정왕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뉴욕이나 런던이 베이징보다 훨씬 재미있다”며 구미 각국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쇼핑에 열을 올렸다. 가까이 지내던 미국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귀국을 종용한 적도 있었다.

재정부장 격인 짜이쩌도 형들에 못지않았다. 국고를 주머닛돈 다루듯이 했다. 어려운 친구들에게 돈을 퍼주고 태후의 용돈도 넘치도록 줬다.

낙향한 위안스카이는 은인자중했다. 낮에는 부인들과 소일하고 해만 지면 무전기 앞에 앉아 북양군의 보고를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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