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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아, 에피메테우스

온라인 중앙일보 2013.07.14 00:02
에피메테우스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존재감이 없다. 그의 형은 제우스가 감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인류의 히어로,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벌로 코카서스의 바위에 묶인 채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면 다시 회복되는 영원한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동생인 아틀라스는 제우스와 맞서 싸우다 패해 천계를 어지럽힌 죄의 벌로 지금도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위대한 거인이다. 반면 에피메테우스는 평범하다. 그러므로 그는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신이다.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한 행인2 같은 사람들의 신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먼저 생각하는 자’란 뜻인 데 비해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을 뜻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선지자·예지자라면 에피메테우스는 어리석은 자, 뒤늦게 후회하는 자다. 먼저 아는 것은 고사하고 남들이 다 알고 있을 때에도 그는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한다. 그는 결말에 가서야 비로소 사태의 전말과 비극의 원인과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 울부짖는 오이디푸스 혹은 올드보이 오대수다. 그러므로 에피메테우스는 후회하는 사람의 신이다. 말과 행동보다 생각이 느린 사람의 신이다. 그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혹은 학교와 회사에서 영혼 없는 표정, 영혼 없는 동작으로 ‘멍 때리고 있는’ 모든 사람의 신이다.



그의 아내는 그 유명한 판도라다. 판도라는 그가 제우스에게 받은 선물이자 형벌이다. 제우스는 여러 신들이 가진 가장 고귀한 것을 판도라에게 주게 했다.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과 유혹을, 아테나는 방직 기술을, 헤르메스는 말솜씨와 마음을 숨기는 법을 판도라에게 주었다. 판도라는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선물이자 형벌인데 그것은 아내가 아름답고 말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아는 자’인 형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에게 판도라를 아내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족의 반대는 결혼을 생각하는 남녀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운명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는 판도라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러므로 에피메테우스는 모든 남편의 신이다. 말솜씨가 뛰어나고 마음을 숨기는 법을 잘 아는 여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 그것이 형벌인지 꿈에도 모르고 살고 있는.



만물이 창조될 때 에피메테우스는 인간과 짐승에게 능력을 부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생각 없이 짐승들에게 재능을 마구 나누어 주다 보니 막상 인간의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전투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용서할 수 없는 병사는 배식에 실패한 취사병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실패한 배식당번의 신이다. 특별할인과 한정판매의 유혹에 넘어가 카드를 긁고 한 달 후 카드명세서를 보며 자학하는 모든 실패한 소비자의 신이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올 온갖 나쁜 것들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급히 뚜껑을 닫아 겨우 희망 하나만이 남았다. 사실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희망은 상자 밖에 있다. 나중이지만 끝내 생각하는 사람, 어리석지만 반성하는 사람, 끝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람, 현대인의 초상 에피메테우스의 모습으로. 판도라의 옆에.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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