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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인 스토리로다시 한 방 터뜨린한국 문단 ‘야전용사’

중앙선데이 2013.07.05 10:43 330호 6면 지면보기
사진 중앙포토
터졌다. 정유정(47) 작가의 소설 『28』이 출간 보름만에 8만 부 가까이 출고되며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권에 올랐다. 30만 부 넘게 팔린 전작 『7년의 밤』(2011)에 이어 2년여 만에 내놓은 신작의 기세가 못지 않다. 토씨 하나 낭비하지 않으며 형용사와 부사를 가급적 피하는 문장 구사,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서바이벌 게임 하듯 밀어붙이는 묘사, 무엇보다 이제까지 국내 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야기의 폭발력-. 정씨가『7년의 밤』을 통해 스스로를 차별화했던 강점들이 확대재생산된 느낌이다.

출간 보름 만에 8만 부 출고『28』작가 정유정

『7년의 밤』처럼 이번 작품 역시 영화 제작자라면 스크린에 곧장 옮기고 싶은 유혹을 느낄 만치 구성과 묘사가 ‘영화적’이다. 이미 네티즌들은 가상 캐스팅에 들어갔다. 주요 등장인물에 따라 서술 시점을 바꾸는 형식은 신(scene)별로 나누어진 시나리오를 연상케 한다. 게다가 여섯 서술자 중 하나는 사람이 아니라 짝을 잃고 슬픔에 젖은 늑대개라니 과감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일명 ‘빨간 눈’이라 불리는 괴질이 발생한 서울 외곽 도시 ‘화양’이 무대다. 28일간 괴질을 겪는 동안 화양엔 지옥도가 펼쳐진다. 패닉에 빠진 정부가 취한 긴급조치는 도시 폐쇄. 도시를 빠져나가려던 사람들은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총살당한다.
사람만 횡액을 당하는 게 아니다. 괴질이 개와 인간에게 발생하는 ‘인수(人獸)공통전염병’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개들에 대한 대규모 살(殺)처분이 실시된다. 알래스카 개썰매 경주에서 썰매개 전원을 몰살시키고 살아남은 수의사, 가난과 싸워야 했던 어린 시절을 트라우마로 간직한 여기자, 속물 중산층 가정에서 차별받고 자라 급기야 개 연쇄살인범이 된 사이코패스, 무법천지가 된 도시에서 아내와 딸을 잃은 소방서 대원, 늘 누군가에 의해 양보를 강요당하며 살았던 간호사의 시점으로 비극의 보고서가 쓰인다.

극한 상황에서 이들이 벌이는 생존을 향한 몸부림, 사랑과 구원의 아이러니 등이 이 소설의 한 갈래라면 다른 한 갈래는 ‘인간의 생명만이 존엄한가’라는 진지한 질문이다. 군인들이 죽창과 총검으로 개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몰살시키는 대목에서 작가가 인용부호 없이 적은 ‘살려주세요’라는 개들의 비명은 공포스럽다 못해 고통스럽다. 5·18 광주 항쟁을 떠올리지 않기 어려운 화양 시민 진압 과정은 이 작품의 지평을 장르 소설 너머로 훌쩍 끌고 나간다. 광주 출신으로 열다섯 살 때 ‘그날’을 목격했던 정씨는 이를 위해 5·18 자료집을 참고, 5월 17일부터 진압을 끝내고 계엄군이 물러가는 날까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화양에서 벌어진 비극의 과정을 설계했다.

정씨는 문학 공부를 정식으로 한 적도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적도 없는, 한국 문단의 ‘야전용사’로 통한다. 간호사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직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다 마흔이 넘은 2007년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면서 비로소 전업작가가 됐다. 오랜 세월 ‘일반인’으로 살면서 키워 오던 글쓰기에 대한 지독한 갈망. 이것이 ‘영상시대 스토리텔러’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그의 내면에 감춰진 뇌관이다.

그는 지난해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작가가 되고 싶은 이유가 글을 쓰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아서인지, 아니면 유명해지고 싶어서인지부터 잘 생각해보라”고 말한 바 있다. 언제라도 불이 붙기만을 기다리는 이 작가의 뇌관에 지금 제대로 불이 붙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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