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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 발코니의 힘!밋밋한 건물이로맨틱 공간으로

중앙선데이 2013.07.05 15:42 330호 22면 지면보기
1 베로나 시 에르베 광장 2 줄리엣의 집 Casa Di Giulietta 중정으로 들어서는 길.3 좁은 중정과 줄리엣의 발코니가 보인다.
봄 학기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될 때면 젊은 시절 즐겨 찾던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이 생각난다. 학기 내내 이어지던 데모의 물결도 끊어지고 최루탄 냄새도 사라질 즈음 신촌 연세대학교의 백양로 길은 짙게 푸르러진다. 잠깐은 낭만적이고 싶어 찾아 들어가면 돌계단의 노천극장은 벌써 젊은 열기로 가득 차다. 먼 나라 이야기를 어설프게라도 흉내 내고픈 그 시절의 배우나 관객으로서는 탁 트인 야외의 시원스러움이 그저 고맙고, 뭔가를 갈망하던 마음도 다소 느긋해진다. 왠지 수다스럽기만한 대사들이나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긴 공연이 끝나고, 이어지는 뒤풀이 향연의 추억들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내 젊음의 롱테이크로 아련히 남아 있다. 1970년대 그때는 가보지 못한 곳의 이야기, 상상 속의 장소들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최명철의 집 이야기 <23> 이탈리아 베로나 ‘줄리엣의 집’

최근 출간된 리처드 폴 로의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기행』에 따르면 ‘한여름 밤의 꿈’ 속 아테네는 그리스가 아니라 ‘작은 아테네(La Piccola Atena)’라 불리던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성 사비오네타(Sabionetta)라는 것이다. 변호사이면서 셰익스피어 연구가인 저자는 이처럼 30여 년간 이탈리아 각지를 찾아다니며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추적한 결과 작품 속 배경들이 허구가 아닌 현실 속 이탈리아의 장소들인 것으로 밝혀내고 있다.

줄리엣의 집은 북부 이탈리아 베로나(Verona)에 있다. 한여름 축제 오페라 페스티벌(올해는 6월 14일~9월 8일)이 열리는 로마시대 유적 아레나(Arena)로 잘 알려진 베로나는 ‘알프스산맥을 무사히 넘은 뒤 브렌네르 고개(Brenner Pass)로 내려올 경우 가장 처음 밟게 될 이탈리아의 첫 번째 도시’다. 교황이 있는 로마를 중심으로 보면 변방 도시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입장에서는 알프스 바로 밑 로마로 향하는 관문이 되는 경계 도시다.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가문, 교황파 몽테규 가문과 황제파 캐플렛 가문의 갈등이 폭발하는 지정학적 숙명의 도시인 것이다.

1302년에 있었다는 두 가문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해오다가 17세기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의해 세계적인 사랑이야기가 되었다.
극중 무대가 된 영원한 사랑의 집 ‘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은 베로나 시내 중심부에 있다. 줄리엣이 살았다고 전해 내려오는 집이다. 원형 경기장 아레나가 있는 브라 광장(Piazza Bra)에서 북쪽으로 가다 보면 왁자지껄한 에르베 광장(Piazza Erbe)이 나온다. 그곳에서 남동쪽으로 꺾어 아디제 강으로 향하는 카펠로 거리(Via Capello)를 걸어가면 왼쪽으로 아치가 있는 탑상형 집이 나타난다. 그곳엔 ‘줄리엣의 집’이라는 조그만 팻말이 있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쪽 마당으로 눈 돌릴 틈도 없이 좌우 벽에 가득 붙어 있는 종이들에 눈이 간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랑 이야기들이 좁은 골목길 안에 아우성처럼 꽉 들어차 있다.

중정(corte)에 들어서면 단아한 줄리엣 동상을 나무 밑에서 마주할 수 있다. 허무하게 죽은 두 연인 앞에서 로미오의 아버지 몽테규는 “나는 순금으로 그대 따님의 동상을 세워서, 베로나의 이름이 남고 남는 동안 진실하고 절개가 굳은 줄리엣의 모습이 세상의 찬양을 받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극중 대사대로 이곳을 찾아 동상 앞에 선 모든 이들은 마치 영원한 사랑을 쟁취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사진 속에 자신의 모습을 남긴다. 이층 벽에 붙어 있는 다소 둔중한 발코니는 1900년대 개보수하면서 첨가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지만, 밋밋한 벽체에 훌륭한 무대장치로서 손색이 없다. 어두운 밤 정원의 로미오가 발코니의 줄리엣과 나누는 대사에 감명받는 수많은 남녀가 있는 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내부는 일반적인 이탈리아식 주택으로서 별 특징은 없다. 현재는 매년 보내오는 사랑의 편지 4만여 통을 상대해 주는 사무실로 일부 사용하고 있다. 증축한 맞은 편 호텔에는 베로나 시가 ‘사랑의 도시’를 내걸고 1000유로에 결혼 예식을 그럴싸하게 치러주고 있어 많은 여행객의 환영을 받고 있다.
로미오의 집은 그리 멀지 않은 북쪽 단테(Dante) 동상이 있는 광장을 지나 좁은 골목길 안에 전형적인 도시형 주택 도무스(Domus)에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 당시 영주 스칼리거(Scaligere)의 미움을 받아 1324년 추방되어 이후 몰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관광도시 밀라노·베네치아 등과는 달리 고대 로마 시절 도시 조직이 잘 남아 있는 베로나의 시민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셰익스피어를 굳이 팔지 않더라도 1302년에 있었던 사실은 단지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베로나 시 홈페이지에도 딱히 로미오나 줄리엣의 집에 대해 별반 소개하고 있지 않다. 그저 알고 찾아다니는 여행객들의 선택일 뿐이다. 아는 만큼 보고 느낀 만큼 생각할 수 있는 여행의 즐거움은 18세기 독일의 대 문호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정말이지, 지난 몇 년 동안은 마치 병이 든 것 같았고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곳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며 이곳에서 지내는 것뿐이다.”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와의 사랑을 질풍노도(Strum und Drang) 같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남긴 괴테(Goethe, 1749~1832)가 ‘온 세계를 위한 위대한 학교’ 이탈리아를 37살 나이에 1년 8개월 동안 여행하면서 남긴 독백이다.
여름 휴가철, 혹시 이탈리아로 여행가는 분들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과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기행』을 미리 읽거나 가져가길 권한다. 꽤나 새로운 느낌으로 유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최명철씨는 집과 도시를 연구하는 ‘단우 어반랩(Urban Lab)’을 운영 중이며,‘주거환경특론’을 가르치고 있다. 발산지구 MP, 은평 뉴타운 등 도시설계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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