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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국교설은 史實무근 수신은 불교, 통치는 유교

중앙선데이 2013.07.06 23:30 330호 26면 지면보기
1 중생을 안락의 세계로 이끄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그린 ‘수월관음도’. 고려시대 불화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이지만 일본 규슈에 위치한 신사인 가가미신사(鏡神社)에 소장돼 있다.[중앙포토] 2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기 위해 제작한 팔만대장경.[중앙포토] 3 연등회와 팔관회 시행을 강조한 훈요십조 부분.
불교가 고려의 ‘국교(國敎)’라는 주장(이하 불교국교설)은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언제, 누가,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했느냐는 의문을 풀어줄 분명한 글은 고려사 연구자인 필자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국교설은 마치 신비주의자의 주술처럼 구전돼 사학자들조차 그런 주술에 휘둘리고 있다. 역사학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다.

고려사의 재발견 '훈요십조'가 말하는 종교 이념

국어사전에, 국교는 ‘국가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보호되고 공인된 종교’라고 나와 있다. 국민이 전부 믿어야 하고, 그 종교의 일(敎務)을 나라의 일(國務)로 취급하는 종교가 국교다. 특정 종교의 이념과 정신이 법과 제도에 반영되어 국가의 통치 이념과 원리가 돼야 국교란 지위가 부여된다는 말이다. 고려 불교국교설을 당연시한 글들 가운데 많이 인용한 근거를 꼽자면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943년)다.
“6조, 내가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이다.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天靈)·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두 행사를)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면, 마땅히 금지하게 하라. 나 또한 처음부터 맹세하기를 (두 행사의) 모임 날은 국기(國忌: 국왕 등의 제사)를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길 것이다. 마땅히 경건하게 행사를 치르도록 하라.”

태조 왕건은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시하고, 반드시 시행할 것을 주문했다. 국왕과 백관이 사원에서 행사를 치른 연등회는 고려의 대표적인 불교행사였다. 연등회 말고도 고려가 불교를 중시한 예는 많다. 돌아가신 왕들의 영정은 주로 사원에 모셔져 사원에서 선왕(先王)의 제사를 치렀다. 고려는 불교와 승려를 위한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시험에 승려를 위한 승과(僧科)를 두었다. 승려들은 승과를 통과해야 사원의 주지 등에 임명되었다. 또한 왕사(王師*왕의 스승)나 국사(國師*나라의 스승) 제도를 만들고 덕이 많은 고승(高僧)을 왕사·국사에 임명했다. 국왕은 새로 임명된 왕사와 국사에게 9번 절하며 제자의 예를 취했다. 이같이 고려시대엔 불교가 다른 어느 종교보다 중시됐고, 불교가 고려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으로 불교가 고려의 국교라고 하기엔 미흡하다.

풍수지리설도 불교만큼 고려 건국에 기여
6조에서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도 강조됐다. 원래 팔관회는 재가신도들이 8가지 금욕적 계율을 지키는 불교행사다. 하지만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 외에 다른 사상도 녹아든 행사였다. 팔관회엔 선랑(仙郞*화랑)이 용·봉황·말·코끼리를 타고 행사에 등장하고, 그 뒤를 사선악부(四仙樂部: 행사의 樂隊)가 뒤따른다. 네 마리 짐승은 불가(佛家)에서 한 해 동안 인간이 행한 일들의 선악을 평가하는 불가(佛家)의 상징이다. 사선악부는 과거 신라 화랑도의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의 사선(四仙)을 형상화한 것이다. 신라 이래 전통사상인 낭가(郎家) 사상을 계승한 증거다. 팔관회 첫날엔 태조의 진전(眞殿)과 역대 국왕에 참배하는 의식을 치른다. 천자를 자처한 역대 국왕에 대한 숭배는 제천(祭天)의례에 해당된다. 또한 고려의 관리와 송나라, 여진, 거란, 일본의 상인들은 고려 국왕에게 천자의 의례를 행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팔관회를 고구려 제천행사인 동맹(東盟)에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이다. 태조가 강조한 팔관회는 민간신앙을 포함한 전통사상, 조상 숭배 및 제천의식을 포함했다. 불교의례만 중시된 게 아니었다. 불교국교설의 또 다른 근거를 살펴보자.
“1조,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왕조 창건)은 불교의 호위하는 힘에 도움을 받았다(我國家大業 必資諸佛護衛之力). 그 까닭에 선종과 교종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그 업을 닦게 하였다. 뒷날 간신이 집권하여 승려들의 청탁에 따라, 사원을 서로 바꾸고 빼앗는 것을 금지하라.”

부처의 힘으로 고려왕조가 건국됐다는 훈요십조 1조는 불교국교설의 유력한 근거로 많이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왕조 건국에 도움을 준 사상은 불교만이 아니었다.
“5조, 짐이 삼한 산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朕賴三韓山川陰佑 以成大業).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국왕은) 사중월(四仲月: 각 계절의 가운데 달)에 그곳에 가서 100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왕조의 안녕을 이루게 하라.”
5조엔 산천의 숨은 도움, 즉 풍수지리 사상도 고려 건국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1조의 ‘우리나라의 대업은 부처의 호위하는 힘에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과 같다. 태조 왕건은 왕조 건국에 두 사상이 동일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1조에 근거한 불교국교설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국왕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오히려 1조가 작성된 취지는 승려들이 뒷날 권신(權臣)과 결탁하여 정치에 관여하거나 사원의 소유권을 빼앗는 등 불교의 폐단을 경계하는 데 있다. 또한 사원을 함부로 지어 지덕을 훼손함으로써 신라가 멸망했다는 전제 아래 승려 도선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정한 장소 외엔 사원을 함부로 창건하지 못하게 규정한 2조 역시 같은 취지다. 불교를 언급한 훈요십조의 1조와 2조는 불교국교설의 근거가 아니라, 불교의 폐단을 경계한 것이다.

후삼국 전쟁이 한창일 때 태조 왕건은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세워 3국을 통일한 예에 따라 개경에 7층탑, 서경에 9층탑을 각각 세워 후삼국을 통합하려 했다. 그러자 참모인 최응(崔凝)은 ‘왕이 된 자는 전쟁 때 반드시 문덕(文德*유교 정치이념)을 닦아야 하며, 불교나 음양(*풍수지리)사상으로 천하를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충고한다. 태조 왕건은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리고 두려워하니 부처와 귀신과 산수의 신령한 도움을 청하려 한다.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러는 것이며, 난리가 진정되어 편안하게 되면 유교 정치이념으로 풍속을 고치고 교화할 것이다’라고 했다(보한집(補閑集) 권上). 왕건은 전쟁에 시달린 민심을 달래주기 위해 불교와 음양사상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나라를 통치하는 데는 유교 정치이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생각은 훈요십조에도 나타난다.
“10조, 가정과 국가를 가진 자는 근심이 없을 때 조심해야 한다. 널리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읽어, 옛일을 거울 삼아 오늘을 경계해야 한다. 주공(周公) 같은 대성(大聖)도 서경의 ‘무일(無逸)’ 편을 성왕(成王)에게 바쳐 경계했다.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붙이고, 들어오고 나갈 때에 보고 살피도록 하라.”

국왕은 항상 역사를 공부하고,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하여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또 7조엔 “신하와 백성의 마음, 즉 민심을 얻는 방법은 신하의 비판과 충고를 듣고 백성을 때에 맞춰 부리고 부세와 요역을 가볍게 하고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결국 위의 두 조항은 모두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 즉 군주의 어진 정치(仁政)를 강조한 것이다. 훈요십조에서 불교국교설은 찾을 수 없다.

지방 세력의 고유한 사상·문화 인정
성종 때(982년)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수신(*불교)은 내생(來生: 다음의 삶)을 위한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유교)은 지금 힘써야 할 일입니다. 지금은 가까운 것이며, 내생은 먼 것입니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찾는 일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고려사 권93 崔承老 열전)
최승로는 이렇게 “수신의 역할은 불교, 통치의 역할은 유교가 각각 맡아야 한다”면서 불교와 유교의 공존을 주장했다. 그는 태조 왕건에게 발탁돼 관료생활을 시작한 태조의 측근문신이었다. 태조 사후(943년) 40년이 지나 그가 제기한 불교와 유교의 역할론은 태조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태조의 생각을 담은 훈요십조에도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풍수지리, 도교와 전통사상 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의 공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과 종교의 다원성을 중시한 태조의 생각은 성종 때 최고의 유학자인 최승로에게까지 계승되고 있었다.

고려사회는 하나의 이념과 사상이 강조된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된 다원사회였다. 고려왕조는 옛 삼국 출신의 수많은 독자적인 지방 세력을 통합하여 건국되었다. 건국 후에도 그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협조를 얻어 왕조를 통치하려 했다. 옛 삼국의 근거지에서 독자 영역을 구축한 지방 세력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를 인정하고 그것과 공존하면서, 민심의 수습과 사회의 통합을 이루어 나가려 했다. 태조의 그런 통치철학이 훈요십조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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