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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장 빛내던 ‘스타인웨이’ 운명은

중앙선데이 2013.07.06 23:32 330호 27면 지면보기
지난 월요일, 미국 스타인웨이사가 사모펀드 ‘콜버그앤코’의 공개매수를 받아들였다는 뉴스가 발표됐다. 2011년 말부터 올 3월까지 최고경영자(CEO) 교체, 전속 조율사 제도 폐지, 맨해튼의 스타인웨이홀 매각 등 사실상의 폐업 수순을 밟아가는 게 아니냐던 우려가 이로써 현실화된 셈이다. 지난 몇 년 새 스타인웨이의 최대주주로 등극한 한국의 삼익악기가 이 공개매수에 응할지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스타인웨이’의 종말을 지켜봄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명품 피아노의 추억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는 독일 출신의 피아노 제작자 하인리히 엥엘하르트 슈타인베크가 맨해튼으로 이주해 1853년 설립한 피아노 제조 및 총판업체다. 설립 2년 만에 ‘아메리칸 인스티튜트 페어’에서 금상을 차지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스타인웨이는 1855년부터 1862년까지 무려 35개의 상을 받으며 피아노계의 왕자로 급부상했다. 1857년부터 따낸 제조 과정 특허권이 총 126개나 되는 이 회사는 그 후 한 세기 이상 피아노계의 범접할 수 없는 황제로 군림해 왔다. 현재 최고로 손꼽히는 전 세계 각지 연주회장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점유율은 무려 98%. 이 시대의 모든 소비재를 통틀어 이토록 전문가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브랜드가 또 있나 싶다.

스타인웨이 설립 시점인 1850년대는 피아노 제조업체의 원년이었다. 현대 피아노의 아버지 격인 세바스티앵 에라르가 1821년 그랜드피아노 액션의 특허권을 따낸 이래 182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이그나츠 뵈젠도르퍼가, 1853년에는 베를린에서 카를 벡슈타인·라이프치히의 율리우스 블뤼트너가, 1885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빌헬름 쉼멜이 각각 피아노 제조업체를 설립했다. 놀랍게도 이 모두가 대부분 성공을 거뒀다. ‘뵈젠도르퍼’를 가장 먼저 지지한 것은 오스트리아 황제로 설립 2년 만에 황실 공식 피아노가 된 뵈젠도르퍼는 20세기 초반까지 음악의 수도 빈에서 가장 사랑받는 피아노로 자리매김했다. 제조 과정에서부터 프란츠 리스트의 조언을 상당 부분 토대로 한 ‘벡슈타인’은 한스 폰 뷜로가 그의 소나타 나단조를 초연할 때 사용된 이후 피아노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드뷔시마저 “피아노 작품은 벡슈타인을 위해서만 작곡돼야 한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미국 여행에 꼭 가지고 가는 것은 딱 두 가지. 첫째는 부인, 둘째는 나의 보석 ‘블뤼트너’”라고 말했던 라흐마니노프의 편애에 힘입어 훗날 런던 애비로드스튜디오에 소장돼 비틀스의 ‘렛잇비’에 출연한 피아노도 바로 이 블뤼트너다. 유럽의 피아노 제조 열기에 질세라 미국인 드와이트 해밀튼 볼드윈이 1873년 오하이오 신시내티에서 루시엔 울슨과 손을 잡고 만든 ‘볼드윈’은 발터 기제킹, 얼 와일드, 조르주 볼레 등의 클래식 스타들부터 레이 찰스와 데이브 브루벡 같은 재즈 스타들의 사랑을 고루 받았다.

유럽 마켓을 겨냥해 1880년 함부르크에도 공장을 세운 스타인웨이는 제1, 2차 세계대전 전후 클래식 음악시장이 미국으로 대거 이동, 확대됨과 동시에 양쪽 시장을 모두 장악한 최후의 승자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뵈젠도르퍼, 벡슈타인, 블뤼트너, 볼드윈, 그 외 그로트리안 슈타인베크(스타인웨이 설립자 슈타인베크의 처녀작), 쉼멜 등 각각의 피아노를 고집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두는 어떤 게 더 낫거나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없이 그저 회사별로 놀랍도록 상이한 음색과 터치감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모차르트는 뵈젠도르퍼로, 리스트는 벡슈타인으로, 라흐마니노프는 블뤼트너로, 스트라빈스키는 볼드윈으로, 나머지 작품은 스타인웨이로 연주하고 싶어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이어 세계 공연장을 독식한 스타인웨이 역시 전통적인 100%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제조 과정 덕에 하나하나가 사람처럼 제각각 그 성격과 소리가 모두 달라 오히려 피아니스트들의 컬렉션 욕구만 자극했다. 대표적인 피아노 수집가였던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자신의 뉴욕 스타인웨이 여러 대를 전 세계로 가지고 다니면서 연주할 정도였으니. 그것은 다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그 피아노 고유의 혼을 흠모함이었다.

이 모두의 일반화는 물론 아시아발 보급형 피아노로부터 시작됐다. 기계 생산 덕에 가격 책정이 순조로워진 이 피아노들 덕에 스타인웨이의 가격은 끊임없이 올랐고 나머지 피아노 업체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인수 합병되지 않고 살아남은 100% 수작업 피아노 중 그 명망을 이어 가는 곳은 뉴욕과 함부르크의 스타인웨이뿐이다.

스타인웨이와 나의 첫 만남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1993년이었다. 당시 원주에 처음 생긴 전문공연장의 개관 기념 음악회. 연주가 다 끝나자 옆자리의 엄마가 나에게 속삭였다. “바로 저 피아노야. 가까이 가서 마크가 정말 S자로 시작하는지 보고 와 봐.”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객석 앞자리로 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며 옆판에 S자를 확인하자니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긴 몸체는 내가 비쳐 보일 정도로 반짝였다. 엄마가 또 설명을 해 줬다. “저 피아노가 세계에서 제일 좋은 피아노라는 스타인웨이야.” 시간은 어느새 흘러 가끔 스타인웨이가 없는 공연장이라고 하면 잠시나마 속으로 투덜대던 한때의 내 습관마저 나도 모르게 없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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