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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고집이 콘텐트다 ⑤ 용인 이영미술관 관장 김이환·신영숙 부부

중앙일보 2013.07.05 00:23 종합 18면 지면보기
목기 300개로 하나의 우주를 이룬 전혁림 화백의 유작 ‘새 만다라’ 앞에 선 김이환(왼쪽)·신영숙 관장 부부. 외국 미술 관계자들이 이 앞에 서면 한동안 말을 잊는다는 대표 소장품이다. [용인=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생광(1904~85)과 전혁림(1916~2010)은 한국의 색과 형태와 질감을 화폭에 흠씬 풀어놓아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이 없음을 그림으로 보여줬다. 두 화가의 공통점은 또 있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미술계 변방에 머물던 이들은 죽는 날까지 같은 후원자로부터 물심양면 지원을 받아 더없이 화려한 예술세계를 꽃피우고 삶을 마감했다.

변방의 두 예술혼에 우리 삶 던져넣었죠



 인연일까. 한국화단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거장 두 사람을 살뜰히 뒷바라지한 김이환(78) 신영숙(74) 부부는 “혈육을 넘어선 두 분과의 만남이 우리 인생의 빛”이었다고 말한다.



타계 때까지 후원자로 물심양면 지원



자신들이 각기 쓴 책을 소개하는 신영숙(왼쪽)·김이환 관장.
 3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영덕동 이영미술관 앞뜰은 땡볕에도 손을 쉬지 않는 이들 부부 목소리로 한여름의 나른함을 잊었다. 김이환씨는 “누가 시켜서 했으면 못했을 것”이라 했다. 오롯이 두 화가를 기리기 위해 이영미술관을 세우고 관장을 맡은 김씨는 평생 동지인 부인에게도 관장 자리를 하나 마련해준 속내를 들려줬다.



 “51년 전 23살 나이에 내게 시집올 때 손녀 신영숙을 예뻐하던 외할머니가 손때 묻은 살림살이 일습을 물려주셨지 뭡니까. 닦고 쓸며 곁에 두었던 기물이 어찌나 실하던지 우리만 보기는 아까워 박물관 등록을 하고 이영미술관 옆에 ‘신영숙 컬렉션’이라 해 전시장을 따로 만들었죠. 이번엔 신영숙 여사가 관장이니 내가 부관장 겸 일꾼인 셈입니다.”



 어둑한 대청마루나 곳간에 들어선 듯 우리 옛 생활도구들이 그들먹한 공간은 가장 한국적인 미감을 찾아 외길을 걸어온 부부를 똑 닮았다.



 신 관장은 “‘영숙이는 야무지게 잘 살 꺼야’ 하시던 외할머니 믿음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다”고 했다.



 이들 부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책도 썼다. 남편이 2004년에 박생광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수유리 가는 길』을 먼저 냈다. 아내는 지난 해 11월 전혁림의 작품 활동을 돕던 20년 세월을 기록한 『통영 다녀오는 길』를 펴냈다. 수유리는 박생광이 타계할 때까지 머물던 서울 강북의 한 동네이고, 통영은 전혁림의 고향이자 말년 작업실이 있던 남녘 항구도시다. 운명처럼 다가온 두 화가와 함께 호흡하고 나란히 걸어온 부부의 여정이 한 편의 소설처럼 펼쳐진다.



 “1977년 어느 날이었어요. 박생광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김선생, 내가 인자(이제) 기리고(그리고) 싶은 기림(그림)이 있소, 도와주겠나?’ 경남 진주농업학교 선배인 박 선생이 간절한 눈빛으로 건너다보시니 ‘제 형편껏 해 보겠습니다’ 할 밖에요.”



 부부는 수유리 박생광의 집을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찾아갔다. 필요한 물감은 외국에서라도 구해왔고, 그림을 위해 해외여행이 필요하면 동반해서 다녀왔다. 경주 남산에 갔을 때는 나이든 화가를 김 관장이 업고 정상에 올랐다. 차로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통영 전혁림의 작업실도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오르내렸다. 집안일로 두어 번 못 내려갔을 때 얼마나 섭섭해 하던지 그 뒤로는 차마 가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부부와 그림 이야기를 나누며 에너지를 얻었던 화가에게 신 관장은 전통 목기에 채색을 한 ‘만다라’ 연작 아이디어를 불어넣었다.



전통 민예품 모아 박물관 열어



 “이승에서 그랬듯이 두 분 화가가 저승에서 지금 내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던 박생광 선생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합니다. 게으를 수가 없죠. ‘신영숙 컬렉션’이 그분들의 작품세계를 뒷받침하는 일종의 자료실 구실을 할 겁니다.”



 김 관장은 “전혁림의 작품을 서구미술 본바닥인 뉴욕이나 파리, 베니스의 미술관에 내보내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이토록 강렬하게 한국적인 미감을 드러낸 작가는 없다”는 확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 통영 앞바다의 물빛이 그득 괸 전혁림의 그림 앞에서 부부는 문득 고인의 한마디를 떠올렸다.



 “세상 모든 그림을 내가 다 잡아먹었다고 나는 자부하오. 저기 불화(佛畵)도 있고 성화(聖畵)도 있고 입체파 그림도 있고 초현실주의 그림도 있소.”



용인=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영미술관=미술품 수집가였던 김이환·신영숙 부부가 2001년 6월 각자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경기도 기흥구 돼지를 키우던 돈사 자리에 세운 사립미술관. 화가 박생광과 전혁림의 작품 수백 점이 핵심 소장품이다. 지난 1일 부인 신씨가 신혼 시절부터 모아온 가야토기·목기류 등 생활 민속공예품을 전시하는 박물관 성격의 ‘신영숙 컬렉션’을 공개했다. 031-213-8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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