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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없는 남자 色 찾아 떠나다

중앙선데이 2013.06.29 01:27 329호 9면 지면보기
지난 4월 한국과 일본의 서점에서는 뭔가 사려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줄을 서는 풍경이 똑같이 연출됐다. 새 스마트폰이나 게임 소프트웨어가 출시됐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조용필의 19번째 앨범 ‘헬로(Hello)’, 일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신작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 彼の巡礼の年)』를 사기 위한 줄이었다. 우연히 시기가 겹쳐 나타난 문화현상이지만 조용필과 무라카미 하루키 사이의 공통점은 짚어볼 만하다.

‘하루키 월드’ 어제와 오늘

한쪽은 국민가수고, 또 한쪽은 (일본에서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국민작가’다. 게다가 조용필(1950년 3월생)과 하루키(1949년 1월생)는 나이도 한 살 차이다. 조용필은 79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결성해 다음해 1집 ‘창밖의 여자’를 발매하며 가요계에 공식 데뷔한다. 하루키도 79년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발표해 군조(群像) 신인문학상을 수상한다. 조용필이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해 그의 이름을 전 일본에 알리게 된 87년에 하루키는 대표작 『상실의 시대(원제는 노르웨이의 숲, ノルウェイの森)』를 발표했고, 한국어로 번역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지금 환갑을 넘긴 나이에 한국과 일본 양국 문화계를 강타하며 트렌드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이 그들의 현재다. 아무도 ‘노익장’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정도로 올해 선보인 그들의 작품은 신선하다. 조용필이 노래에서 젊은이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했듯, 하루키는 소설에서 그것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만 열광시키는 것은 아니다. 청춘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한 세대에게 청춘의 기억을 어제 일처럼 되살려주는 힘이야말로 7월 1일 한국에서 출간되는 신작을 기대하는 이유다. 과연 하루키의 신간 소설이 조용필의 노래 ‘바운스’처럼 전 세대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있을까.

하루키를 세계에 알린 『상실의 시대』는 20여 년간 상·하권 합계 1000만 부(한국어 번역본은 단권) 넘게 발행됐다. 『1Q84』 3부작(2009~2010)은 출간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세 권 합쳐 770만 부 넘게 발행됐다. 그를 ‘국민작가’로 위치시키는 요인에는 이러한 일본 내 수많은 독자층의 존재만이 아니라, 세계 40여 개국에 번역 출판돼 사랑 받고 있는 사실도 자리한다. 수년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전 세계를 열광시킨 『1Q84』 이후 3년 만에 선보인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대한 일본인들의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초판으로 30만 부가 준비됐지만 4월 12일 발매되자마자 바로 재고가 바닥났다. 한국에서는 ‘출간 7일 만에 100만 부 돌파’라고 보도되기도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출판사가 7일 만에 100만 권을 찍어냈다. 6월 3일 오리콘 차트에는 상반기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됐고 당일 기준 총 85만 부가 판매됐다. 이제 하루키 소설의 발매는 일본 사회에서 마치 하나의 축제가 된 것이다.

사회와 역사에 무심했던 초기작
‘70년 안보(安保)’라 불리는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절 하루키는 와세다대 문학부에 재수를 해 들어간다. 그는 전투적인 사회 분위기와는 거리를 두고 재즈카페나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생활을 보낸다.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양을 쫓는 모험』(1982), 『상실의 시대』등 초기작들을 보면 사회 한 쪽의 치열함과 격렬함이 분명 존재하지만 주인공은 방관자 또는 관찰자적 입장을 취한다. 하루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듯한 주인공은 자기 주변의 일과 내면을 향한 탐구에 힘을 쏟는다.

기본적으로 그의 작품은 일본의 전통적 소설 형식인 ‘사소설(私小說)’의 형태다. 반면 ‘일본어로 된 영어소설’이라고도 불리듯 내용적으로는 미국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일본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형식과 내용의 불균형을 바탕으로, 지극히 일상적인 것을 독특한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그의 문체는 독자를 몽환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하나의 사물이나 행위를 서술하고 그에 대해 독특한 비유를 추가하거나 구체적인 브랜드 이름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자세히 그 특징을 말하고, 거기에 거침없으면서도 세밀한 성(性)묘사가 어우러진다.

그의 소설을 읽고 무슨 사건이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되었고, 범인은 누구인지를 따지는 일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무슨 감정이 어떠한 문장으로 표현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독자는 자신의 내면에서 끄집어내어 글로 확인하고 싶었던 감정을 그의 소설에서 발견하고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느낀다.

이런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음악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이 배경음악을 찾아 듣듯, 하루키 소설을 읽은 독자는 음악을 찾아 나선다. 『1Q84』에서 배경음악과 같은 역할을 하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Sinfonietta)’는 한 해에 50장 정도 팔리던 CD가 소설 발매 후 2만 장 이상 팔리기도 했다.

사회 향해 목소리 내기 시작한 90년대
90년대 들어 하루키는 일본 사회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태엽 감는 새』(1994~95)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이 벌인 전쟁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95년 한신대지진과 옴 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살포사건은 그의 작품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독가스 살포 사건의 피해자와 관계자를 인터뷰해 논픽션 『언더그라운드』(1997)를 발표하기도 하고, 한신대지진의 영향을 다양한 형태로 그려낸 연작단편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2000)를 내놓기도 한다. 『해변의 카프카』(2002)에서는 『겐지 모노가타리』와 같은 일본의 고전문학을 인용하면서 ‘일본어로 된 영어소설’이라는 초기 작품의 틀을 허물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1Q84』는 그간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집대성해 보여준다. 만주국과 같은 역사적 지명이 등장하고, 옴 진리교를 연상시키는 종교단체가 나오며, 일본의 고전문학이 길게 인용된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은 하루키를 또 한번 변화시킨다. 언론 노출을 꺼리던 그가 일본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 6월 스페인에서 카탈로니아 국제상을 수상한 하루키는 ‘비현실적인 몽상가’라는 제목의 소감문을 발표한다. 거기에서 그는 일본이 원자폭탄의 피해를 본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을 너무도 쉽사리 받아들였고, 관리도 허술했음을 비판했다. 지난해 9월 한·중과 일본 사이에 독도 및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싸고 긴장이 첨예화됐을 때는 아사히신문에 기고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이 글에서 영토 문제로 국민 감정을 선동하는 행위를 ‘싼 술(安酒)’에 비유하며 “싼 술에 취하면 사람이 단순해지고 거칠게 되지만 결국 남는 것은 두통뿐”이라고 일갈했다.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작품 내외에서 직간접적으로 풀어내는 이런 변화의 행보는 그의 ‘국민작가’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다지는 데 기여해왔다.

다시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
하루키 신작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이런 국민적 기대감을 반영한다. 그간 일본 사회는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다. 현실 참여적 노선을 분명히 택한 것으로 보이는 하루키가 그런 변화를 신작에 어떻게 반영해 냈을지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하지만 놀랍게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는 그런 면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일본 사회에 대한 관심의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다시 개인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돌아갔다. 역사적 배경이나 고전에 대한 인용도 전혀 없어 마치 초기작을 읽는 느낌이다. 하루키는 이제 사회적 메시지를 굳이 문학속에 녹여낼 것 없이 직설적으로 하고, 소설 세계는 그 자체로 완결지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자를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하루키 월드의 매력은 색깔을 더했다.

‘색채가 없는’이라는 제목과 모순되게 표지는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라는 귀에 익숙지 않은 미국 화가의 컬러풀한 그림 ‘불기둥(Pillar of Fire)’이 장식하고 있다. ‘불기둥’이라기보다는 색연필 모음으로 보이는 이 그림은 소설의 기본적인 구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고등학교 시절 어울려 지내던 친구 네 명의 이름에는 모두 색깔이 들어간다. 공부를 잘하는 아카마쓰(赤松)에게는 빨강, 럭비부로 운동 잘하는 오미(靑海)에게는 파랑,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를 잘 치는 시라네(白根)에게는 하양, 활발하고 유머가 있는 구로노(黑埜)에게는 검정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주인공 다자키(多崎)의 이름에는 색깔이 없다. 다자키는 이름에 색깔이 들어가 있지 않음을 인간으로서의 색깔이 희미한 것으로 느끼고, 색깔이 확실한 다른 네 명의 친구들을 언제나 부러워한다. 네 친구들은 고향인 나고야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반면 다자키는 혼자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떠난다. 어느날 네 친구로부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절교를 당하고 자살을 꿈꿀 만큼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다자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꿈을 통해 ‘질투’라는 감정의 존재를 깨달은 그는 소년 티를 벗고 남자로 거듭난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어릴 적 꿈을 이뤄 기차역 짓는 일을 하고 있지만 신축이 아닌 유지 보수가 대부분인 그의 삶에는 여전히 색깔이 없다. 과거의 상처를 어설프게 덮어놓은 자기만의 역에 머물고 있다. 그러다 마침내 여행을 결심한다. 새 여자친구의 권유로 과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찾아 나선다. 소설은 이를 ‘순례’라고 부른다. ‘순례’는 중의적으로 쓰인다.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한 피아노곡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는 하루키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 거듭 등장해 연주되는 배경음악의 제목이면서, 주인공 다자키가 옛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가리킨다. 이는 결국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행이며 자기 색깔을 찾아나선 여행이다.

독자는 도대체 이 ‘색깔 없는 남자’에게 무슨 사건이 일어났고, 이유가 무엇이며,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 추리소설을 읽듯 그의 순례여행을 좇아가며 숨가쁘게 책장을 넘겨야 한다. 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도 수수께끼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그의 삶에도 큰 변화는 없다. 사건을 해결하고 벌여놓은 이야기를 수습하려는 의지도 찾아볼 수 없다. 하루키 월드에선 그것이 그다지 의미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평범하면서도 독특한 색채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해 꿈과 현실을 오가는 다채로운 이야기의 디테일에 주목해야 하고, 때때로 소설 속에서 연주되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도 분명 산재하고 있는 감정을 음악과 같은 선율로 빚어낸 문장을 발견할 때, 그래서 잠자고 있던 내면이 ‘똑똑’ 두드려질 때, 이 색깔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더운 여름날 독자의 가슴을 ‘바운스’시킬 것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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