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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높은 문턱 넘어서려면 쓸모를 포기하라

중앙선데이 2013.06.29 01:36 329호 14면 지면보기
1 ‘신데렐라의 복수’라는 전시회에 출품된 신을 수 없는 구두. 실용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환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생활보다 전시장에 적합한 ‘예술품’이 되었다.
디자인 전시회에 가는 관람객들의 기대는 어떤 것일까? 전시란 뭔가 특별한 것을 보여주는 자리다. 그만큼 평소에 보지 못했던 굉장한 걸 보게 될 거라는 설렘이 있을 것이다.

김신의 맥락으로 읽는 디자인 <16> 순수와 실용

그러나 디자인은 사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가전제품ㆍ주방용품ㆍ가구ㆍ조명ㆍ자동차 따위들. 물론 이런 일상용품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하게 잘 디자인된 것이 전시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예술작품이 되는 건 아니다. 생김새가 남다른 컴퓨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컴퓨터이지 조각품이 되는 건 아니다. 컴퓨터가 조각품처럼 아름답더라도 공장에서 똑같이 대량으로 복제되어 백화점이나 마트 같은 곳에서 팔리는 ‘상품’이다. 처음부터 갤러리에 진열되려고 태어난 디자인은 없다. 그런 평범한 신분의 디자인이 문턱 높은 미술관에 들어선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디자인은 미술관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원래 과거의 미술품도 지금의 디자인처럼 생활 속에서 각자 맡은 바 구실을 했다. 조각은 건축의 일부로서 신전을 찾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비를 체험하게 했다. 회화 역시 비슷한 기능을 했다. 성경의 이야기를 신비화하고, 국가의 지도자를 영웅으로 묘사해 이를 시민들에게 가르치는 식이다. 궁전에는 역대 왕과 왕비들의 초상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예술작품이기 전에 왕권의 강력한 상징으로서 구실했다. 회화와 조각은 건물 안에 포함된 가구나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가 만들어낸,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물건이었다. 물론 기술자의 수준 차이에 따라 더 우수한 제작물, 초상화처럼 더 존귀한 제작물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회화와 조각은 순수한 예술품이고 가구와 도자기는 실용적인 공예품이라고 구분하진 않았다.

2 위베르 로베르의 ‘루브르의 웅대한 전시실’(1795). 혁명세력은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으로 개조했다. 원래 있던 위치에서 벗어나 미술관에 함께 모인 예술품들은 ‘왕권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3 뉴욕 현대미술관이 1934년 처음으로 개최한 디자인 전시 ‘기계 예술’전의 전시장. 비행기 프로펠러, 볼 베어링 등 분리되고 해체된 기계의 부품에서 기능을 떠나 순수하고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4 BMW M1 컨셉트카. 컨셉트카는 실용적인 대량생산품이 아니라 쇼를 위해 보여주는 자동차다.
기능을 떠난 ‘순수’ 예술작품의 탄생을 부추긴 것은 무엇일까? 이는 미술관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 혁명 정부는 루브르 궁의 날개 부분을 미술관으로 바꾸고 그곳에 예술작품들을 모아놓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 왕의 권위가 증발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장소에서 떨어져 나와 미술관에 모여 있는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특정 왕의 권위와 업적을 떠올리고 찬양하기보다 그야말로 형태와 색채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재현 기술에만 감탄할 것이다. 초상화 속의 인물은 더 이상 관객에게 어떠한 신비와 권능도 보여주지 못한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미술관으로 옮긴다고 상상해 보라. 그 역할이 얼마나 축소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미술관의 탄생이야말로 20세기에 일어난 순수 회화의 길을 200년 전에 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미술관 설립을 반대했던 캬트르메르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의 새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예술작품을 사치품으로 다루거나 작품의 형식적이고 기교적인 장점만을 고려하도록 만든다…박물관의 예술작품은 행동과 감정, 삶이 박탈된 영혼 없는 육체, 공허한 모사일 뿐이다.”(래리 쉬너의 『예술의 탄생』 중). 그리고 그 우려는 실제로 현실이 됐다.

20세기에 들어와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어떤 특정하고 구체적인 대상이나 내용을 묘사하고 재현하는 대신 선과 색, 형태와 구도만으로 된 순수하고 형식적인 미를 추구했다. 이것이 더 우월한 예술, 즉 창조에 더 가깝다고 본 것이다. 이로부터 추상예술이 탄생했으며, 예술가와 미술관은 이를 우상화하는 데 앞장섰다.

순수함이 미술관의 높은 문턱을 넘어서는 데 중요한 기준이라면, 일상의 물건을 만드는 데 봉사하는 디자인은 미술관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장르다. 그러나 미술관 전문가들은 일상의 사물에서도 순수함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1932년에 건축/산업미술부를 창설한 뒤 일련의 모더니즘 디자인 전시회를 개최했다.

건축가 필립 존슨이 큐레이팅한 현대미술관 최초의 디자인 전시인 ‘기계 미술’전은 1934년에 개최됐다. 이 전시에 출품된 디자인은 비행기의 프로펠러, 완충 스프링, 배의 모터 프로펠러, 기계 속에 있는 거대한 볼 베어링, 화학실업용 플라스크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원래 있던 공간이나 사물에서 빠져나와 그 선과 형태, 매끈한 질감, 아름다운 비례를 뽐내고 있었다. 즉 일상 속 기계로서의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나 순수하고 추상적인 오브제로서 발견되고 진열된 것이다.

기능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이 전시품들은 일상의 쓸모 있는 물건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관람객들로 하여금 찬미와 경배를 이끌어내려면 일상의 평범한 물건으로는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미술관을 위한, 또는 전시를 위한 ‘작품’을 만들려는 디자이너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 전시품이 되려면 기능과 쓸모라는, 물건이 가져야 할 실질적인 필요를 초월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이것은 미술관은 물론 대규모 산업 박람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컨셉트카 같은 자동차는 기능적인 차라기보다 조각품으로 디자인된다. 패션쇼의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의 옷을 일상에서 입기란 쉽지 않다. 백화점 쇼윈도 속 럭셔리 상품 역시 환상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은 생활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오브제다. 설령 그 디자인이 일상에서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아주 극히 적은 시간 동안이다. 미술관으로 들어가기 위해 디자인은 쓸모를 희생시키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반면에 실질적으로 우리 곁에 있고 매일 사용하는 디자인은 이런 환상과는 무관하다. 이런 것들은 영원히 미술관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사랑받고 착취당하고 폐기되는, 자연스럽고 생생하며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하게 된다.



김신씨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7년 동안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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