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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 양지만 고아 깔끔한 진국에 무첨가물 밀국수

중앙선데이 2013.06.29 02:01 329호 22면 지면보기
1 한우 양지로 국물을 내서 칼국수를 넣어 끓여낸 국시와 노릇하게 구워진 대구전.
국수와 국시의 차이는? ‘국수는 밀가루로 만들고 국시는 밀가리로 맹근다’.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사실 진지한 책 제목이기도 하다. 경상도 사투리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여기에서 시작되어 다른 사투리 농담들도 꼬리를 물었다. 밀가루와 밀가리의 차이는? 밀가루는 봉투에 넣어 팔고 밀가리는 봉다리에 넣어서 판다. 봉투와 봉다리의 차이는? 가게 아줌마가 담아주는 것은 봉투이고 점빵 아지매가 담아 주는 것은 봉다리다, 등등.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19> 청담동 국시집 ‘두루’

표준어에 밀려 힘을 못 쓰고 있지만 사투리는 때로 언어에 특별한 의미를 불어넣는다. 국수 하면 그저 평범한 느낌이지만 국시 하면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장인이 오래도록 고집스럽게 지켜온 손맛이 녹아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도 시중에서 국시라고 불리며 판매되는 국수는 일반적인 잔치국수와는 다르다. 맑은 멸치국물에 소면을 말아내는 가벼운 방식이 아니라 쇠고기로 만든 고기 국물에 칼국수를 넣어 끓여낸다. 옛날부터 경상북도의 양반가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 만들어 내던 음식이라고 한다.

사실 전통 있는 양반 가문에서 지키던 가장 중요한 덕목 두 가지가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이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만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국수 한 그릇을 대접하더라도 충분히 요기가 되도록 정성스럽게 귀한 고기 국물로 끓여서 제대로 요리를 해냈던 모양이다.

2 두루 입구. 3 음식 맛처럼 깔끔하고 단아한 두루 내부.
으스스한 계절에는 물론이고 여름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면 이 뜨끈한 고기 국물의 국시가 별미로 생각나곤 한다. 이럴 때 내가 자주 가는 국시집은 강남구 청담동의 ‘두루’라는 곳이다.

‘두루’는 경상북도의 양반가에서 내려오던 음식들을 해내는 곳이다. 경상도 출신인 박미영(52) 대표가 할머니 친구분에게 이 음식들을 배워 2002년 문을 열었다. 원래는 살림만 하던 가정주부였는데 좋아하는 음식을 해서 남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음식점을 시작하게 됐다. ‘두루’라는 이름도 좋은 음식을 함께 두루두루 누리자는 의미에서 만든 이름이다.

처음엔 국시와 수육, 전 그리고 묵, 이렇게 네 가지 음식이 전부였다. 가족들이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잡다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좋은 재료를 써서 정성스럽게 만들어 냈더니 차츰 좋아하는 단골들이 늘어나면서 꾸준히 잘 되어 갔다. 직구 승부가 통했다. 이제는 손님들 대부분이 단골들이고 매니어층까지 생겼다.

이곳의 국시는 깔끔하면서도 진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쇠뼈도 쓰지 않고 오로지 한우 양지로만 오랫동안 끓인 육수로 만든다.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끓여내는 덕분인지 잡미가 거의 없다. 애호박을 넣고 마늘과 파와 고추로 양념을 한 깊은 맛의 국물을 한 수저 뜨는 순간 입안에 꽉 들어차는 맛에 푹 빠진다. 아무런 첨가물이 없이 밀가루로만 반죽을 해서 얇게 뽑아낸 국수 가락은 끈기가 없는 듯하지만 대신 술술 잘 넘어간다. 위에 부담을 주지 않고 잘 소화될 것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다. 함께 내어놓는 깻잎·부추·배추김치 삼종 세트로 입맛을 다셔가며 훌훌 먹다 보면 어느새 한 그릇이 뚝딱 비워진다.

국시뿐만이 아니라 쇠고기 수육과 전도 맛깔난다. 1+ 등급의 한우로 만드는 수육은 부드럽고 감칠맛이 있어서 언제 먹는지도 모르게 사라지기 바쁘다. 박 대표에게 이렇게 맛있는 수육을 만드는 비결을 물었더니 허망하게도 “맛있는 부위를 잘 삶아낸다”는 심플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마디로 원칙에 충실하면 맛이 난다는 것이다. 노릇노릇하게 부쳐내는 대구 전은 겉은 파삭파삭 씹히는 맛이 있으면서 속은 포슬포슬하게 부드럽다. 역시 좋은 재료를 쓰고 좋은 기름을 사용해서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맛이 난다.

밀이 많이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국수는 원래 귀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처녀 총각에게 “언제 국수 먹여줄 거야?” 했던 것은 국수가 혼삿날에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수입 밀가루가 진작에 흔해지면서 이제는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됐다. 그래도 귀하던 시절에 정성스럽게 손님을 대접하던 전통이 살아있는 양반 가문 출신의 ‘국시’를 먹을 때면 아직도 특별한 느낌이 든다. 마치 내가 귀한 손님이 되어서 ‘억수로’ 대접을 잘 받는 것 같은.

**두루
서울 강남구 청담동 22-11 전화: 02-3443-5834
쉬는 날 없이 일요일에도 영업한다. 갤러리아 백화점과 동판교에 분점이 있다. 국시 9900원.



음식, 사진, 여행을 진지하게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마케팅·리서치 전문가. 경영학 박사 @yeongs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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