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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가수의 넋두리가 시작되자 조승우는 사라졌다

중앙선데이 2013.06.29 02:05 329호 24면 지면보기
‘뮤지컬 지존’ 조승우가 돌아왔다. ‘닥터 지바고’ 이후 꼭 1년 만이다. 그런데 좀 뜻밖이다. 화려한 대극장 무대나 화제만발 신작이 아니라 8회째 재공연을 하고 있는 소극장 뮤지컬 ‘헤드윅’이다. 2005년 초연 무대와 2007시즌 이후 6년 만에 다시 헤드윅으로 돌아온 이유를 그는 “실컷 놀고 싶어서”라고 했다. 직접 골랐다는 올인원 스타일의 핫팬츠에 긴 생머리 가발로 한껏 멋을 내고 돌아온 그는 정말 극장 전체를 무대 삼아 관객을 주무르며 한바탕 질펀하게 놀고 있었다. 객석도 덩달아 놀아야 했다. 하지만 두 시간의 원맨쇼 끝에 전해진 깊숙한 울림에, 돌아서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뮤지컬 ‘헤드윅’ 6월 8일~9월 8일까지 백암아트홀

뮤지컬 ‘헤드윅’. 국내에서 8년간 1300회 공연을 이어오면서 전회 기립과 수백 차례 전석 매진을 기록한 작품이다. ‘뮤지컬 사관학교’라 불릴 정도로 주인공을 거쳐간 10여 명의 배우는 모두 스타가 됐다. 흥미로운 것은 꽃미남 계열의 배우들이 여장을 하고 ‘미모’를 겨뤄왔다는 것. 흔히 남장여자나 여장남자가 등장하는 ‘복장도착’의 무대는 관객이 배우를 보러 가게 마련이다. 남장여자로 유명한 일본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베르사유의 장미’가 대표적이다. 수많은 스타가 ‘오스칼’에 등극할 때마다 팬들은 작품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배우를 보러 간다. ‘역대 최고로 금발이 잘 어울린다’느니, ‘하얀 제복을 누구보다 잘 소화했다’느니, 작품은 배경으로 밀어놓고 배우의 매력만이 비교의 도마에 오른다.

‘헤드윅’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조승우를 보러 갔다. 관객과 눈을 맞춰가며 극장을 유유히 가로질러 등장한 것은 분명 조승우였다. 천연덕스러운 애드립 공세로 객석을 휘어잡으며 무대 한가운데로 모든 시선을 집중시킬 때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넋두리하듯 한 트랜스젠더 가수의 모진 삶을 1인칭 화법으로 덤덤히 반추해 가는 동안 어느새 조승우는 무대 위에서 사라졌다. 거기엔 헤드윅만 있었다. ‘좋은 배우는 자기를 보이지 않는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조승우는 애써 연기하지 않았다. 그저 헤드윅으로 호흡하며 객석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하고 있을 뿐이었다.

헤드윅이 대체 누구길래? 성전환수술에 실패해 ‘성난 1인치’의 살덩이를 달고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삶을 살고 있는 동독 출신의 록가수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어도 성소수자 앞에 가로놓인 장벽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이 그의 슬픔이다. 그가 구사하는 기괴하리만치 진한 화장과 촌스럽게 반짝이는 노출 의상은 트랜스젠더를 표상하는 외모다. 개성보다는 천편일률의 이미지로 기억되며 ‘왜 저렇게까지?’ 싶은 혐오감마저 드는 저들의 겉모습이 한낱 예뻐지려는 꾸밈이 아니라, 진짜가 아닌 이들의 눈물을 가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임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헤드윅이다.

“신은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바로 베를린 장벽이야! 날 부셔!” 강렬한 록사운드를 타고 울리는 그의 외침은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이분법이 꼭 정답은 아니라고 호소한다. 신에 대한 저항의 근거는 다름 아닌 신의 책임론이다. 테마곡 ‘The Origin of Love’는 플라톤의 ‘향연’ 속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를 빌려와 신의 실수를 되새긴다. 신이 인간을 남자, 여자로 갈라놓기 전에는 소년과 소년, 소녀와 소녀, 소년과 소녀가 한 몸을 이룬 세 가지 성(性)이 있었으니, 동성 간의 사랑도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는 사랑의 한 형태일 뿐임을 2500년 전 고대인들도 인정했다는 것이다. 헤드윅은 그저 ‘반쪽’을 찾고 싶을 뿐인데, 세상이 그 사랑을 인정해주지 않으니 속옷에 토마토를 넣고 여자 흉내를 내야 하는 몸뚱이를 만든 신에게 반항할 수밖에!

치렁치렁한 가발과 꼭 끼는 원피스를 벗어 던지고 속옷에서 토마토 두 개를 꺼내 신에 대한, 세상에 대한 분노를 삭이듯 마지막 한 방울까지 조용히 쥐어짜는 조승우의 몸짓은 절제된 만큼 더 진실해 보였다. 서늘한 표정으로 객석을 쏘아보는 눈길엔 다들 뜨끔했을 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대다수의 우리에게, 저들의 비극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은 ‘아프다’는 외침이나 ‘슬프다’는 눈물이 아니었다. ‘진짜’에 빙의된 고요한 눈빛 한 줄기가 더 힘이 셌다.

종교집회를 패러디하듯 일제히 손을 들어 무대 위 ‘그분’을 영접하는 엔딩에 이르자 신에 대한 비아냥에 저도 모르게 동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헤드윅을 이해할 순 없어도 “이제 그만 울자”고 달래주고 싶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헤드윅의 고통을 피부로 느끼게 만든 건, 보이지 않는 조승우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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