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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왕과 나

중앙선데이 2013.06.29 02:27 329호 30면 지면보기
옛날 중국에 시를 좋아하는 왕이 있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시를 읽더니 어느 날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다. 하루는 평소 흠모하던 시인을 초청해 자신이 쓴 시를 보여주었다. 왕이 말했다. “선생, 진솔하게 평해 주시오. 어떤 비난의 말씀이라도 괜찮소.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니까.” 시를 다 읽은 시인이 말했다. “그저 운을 맞추었을 뿐 표현은 진부하고 구성은 산만해서 차마 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디 시는 잊고 정사에 전념하십시오.” 왕은 웃고 싶었으나 웃어지지 않았다. 왕은 시인을 당장 감옥에 가두라고 신하들에게 명했다.

지난 3월 평소 존경하던 주한 피지 관광청 박지영 지사장에게 이번에 쓸 칼럼 소재가 ‘가훈’이라고 했더니 관심을 보이며 초고가 완성되면 한 번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초고를 보냈다. “냉정한 코멘트를 바랍니다”라는 당부를 붙여서.

회신이 왔다. “냉정한 코멘트를 기대했다면 잘못 보내신 겁니다. 팬은 절대 냉정해질 수 없답니다. 다만 이번 글은 어려운 글귀가 자주 등장해서 그런지 좀 재미가 떨어지네요. 예시가 글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나 너무 많으면 산만해지죠. 관련 없는 예시는 빼고, 관련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상술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도입부에 뇌세포·정전·호흡 등으로 ‘긴장’을 표현했지만 사실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한두 개로 줄여 조금 더 생생한 표현을 쓰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짧은 글일수록 많지 않은, 그러나 가슴에 꽂히는 표현이 특히 앞 부분에 있을 때 인상에 많이 남더군요. 일부러 훈수를 두었습니다. 어렵게 보내주셨는데 ‘잘 읽었어요. 너무 재미있어요’라고만 하면 좀 허무하지 않겠습니까. 일부러 까댄 것이니 상처를 받거나, 절대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시길.”

그의 당부와 달리 나는 상처 받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제 글을 그만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나는 칭찬을 받아야 더 잘하는 나약한 사람이다. 지적과 비판을 받으면 주눅이 들고 아예 포기해버리는 약골이다. 그런 내 심사는 최대한 감추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답장을 보냈다.

“요즘 슬럼프라, 늘 슬럼프입니다만, 이번 글도 불안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쓴 글이다 보니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지사장님 메일을 읽는 순간 어둠 속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는데 전등이 켜진 것처럼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동시에 부끄러웠습니다. 꼼꼼하게 읽어주고 또 정성껏 모니터해주셔서 깊이 감사합니다. 다음번엔 생생한 글을 써 지사장님의 인상에 깊이 남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나는 위로와 격려의 답장이 올 거라고 기대했다. 답장이 왔다. “슬럼프인 거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 좋아요, 하면 안 되지요. 약은 입에 쓰니까 약 드시고 기운 차려 얼른 극복하세요.”

이레가 지나자 왕은 후회했다. 감옥에 가둔 시인을 다시 불렀다. “선생의 평이 옳았어요. 저번의 내 시는 엉망이었소. 이번에 다시 시를 지었으니 이걸 한번 읽고 평해 주시오.” 왕의 시를 다 읽은 시인이 엎드렸다.

“왕이여,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일주일 후 나는 새 초고를 박 지사장에게 보냈다. “지사장님, 이번에도 약이 되는 말씀 기대할게요.” 회신은 끝내 오지 않았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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