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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의 시대공감] 어느 식료품 가게서 배운 ‘사회적 자본’

중앙선데이 2013.06.29 22:49 329호 31면 지면보기
오래 전 미국에 공부하러 간 초기에 생긴 일이다. 식료품 가게에서 다진 고기 한 덩어리를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영수증에 두 개 산 것으로 계산되어 있었다. 판매원이 실수로 계산대를 두 번 통과시킨 것이었다. 단돈 1달러가 아쉬운 유학시절이어서 속이 쓰리기도 했지만 사지도 않은 물건을 계산한 것이 억울했다. 당장 가서 항의하고 싶었지만 이미 매장을 떠난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일주일 뒤 다시 그 가게에 갔다. 돈을 돌려받는 것은 포기했지만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아 항의조로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내 불평을 들은 직원은 영수증에서 고기 한 덩어리 산 것을 빨간 볼펜으로 지우더니 미안하다며 바로 환불해 주는 것이었다.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망치로 뒤통수를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내 말을 믿고 선뜻 돈을 내준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두 개를 사고 나중에 한 개만 샀다고 떼를 쓸 수도 있겠다는 나쁜(?) 생각까지 들었다.

 이 사건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유학기간 내내 생각했다. 왜 내 말을 믿고 돈을 돌려줬을까. 이런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는 어디서 나올까. 나름 두 가지로 추론해 보았다.

 하나는 그 가게와 나는 한 번에 끝나는 게임(one-shot game)이 아닌 연속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단발(單發)게임이라면 상대에게 협조할 동기유인이 생기기 어렵다. 그러나 연속게임이라면 게임 룰이 달라진다. 상대와 협동하는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을 극대화할 수 있다. 뜨내기손님이 오는 역 근처 식당과 단골손님이 오는 동네식당 음식 맛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인근 주민이 주 고객인 식료품 가게가 역 근처 식당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거래비용(transaction costs)의 최소화라는 추론이었다. 내 항의가 맞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해 확인하거나, 아니면 내 신용이나 평판, 과거 거래기록을 조사하는 비용을 써야 한다. 돈일 수도, 시간일 수도 있다. 그 비용을 지출하는 것보다 상대를 신뢰하고 거래하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나중에 속인 것이 발견되면 사회적으로 엄한 응징을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식료품 가게에서 10달러도 안 되는 작은 거래를 통해 신뢰와 같은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을 경험한 셈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다시 공직에 복귀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를 높여 사회적 거래비용을 낮추는 방안들이다. 여러 해 전 국가발전전략인 ‘비전 2030’을 준비하면서는 정부 공식보고서에 처음으로 사회적 자본의 확충을 핵심 전략 중 하나로 포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노력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다 함께, 그것도 오랜 기간에 걸쳐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다.

 앞에서 한 추론이 맞다면, 사회적 관계를 가능하면 단발이 아닌 연속게임으로 만들어야 한다. 선거 때 정치인들이 무분별한 약속을 남발하는 것은 유권자와 단발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약의 이행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거나 공약(空約)이 된 공약(公約)을 유권자가 기억하고 심판한다면 선거라는 정치적 거래관계도 연속게임으로 만들 수 있다.

 사회적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 대화와 타협이 중요하다. 최근 정책 최우선 순위인 일자리 창출 대책을 준비하면서 더욱 절실히 느꼈다. 경제성장, 적극적 고용정책, 노동시장 구조개선, 교육을 포함한 노동력 공급 개혁문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4차 방정식인 일자리대책은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노사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조금씩 양보하며 신뢰를 쌓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나갈 때 실현될 수 있다. 요컨대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도 사회적 자본의 확충은 꼭 필요한 것이다.

 국가경쟁력은 사회의 신뢰 수준에서 결정된다. 한국을 ‘저(低)신뢰사회’라고 했던 후쿠야마 교수의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되돌아본다. 우리 사회시스템에 신뢰의 위기는 없는 것인지. 몇 년째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수준에서 정체된 근인(根因)이 이것과 관련되지는 않는지. 최근 논쟁이 뜨거운 경제민주화, 갑을(甲乙)문화, 양극화, 상생, 기업의 사회적 책임들도 이런 문제의 다른 이름은 혹 아닌지.



김동연 국무조정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과 예산실장,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을 지냈다. 상고 졸업 후 은행과 야간대학을 다니며 행정·입법고시에 합격했다. 미국 미시간대학 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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