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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 사이 번민 해결한 서구 최초 자서전

중앙선데이 2013.06.29 23:13 329호 28면 지면보기
종교는 효과적인 힐링(healing) 수단이다. 동시에 힐링이 필요하게 만드는 번뇌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의 경우에도 그랬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⑩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나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먹을 걱정은 없는 집이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공무원인 아버지는 쭉 안 믿다가 돌아갈 때 세례를 받았다. 나는 어렸을 때 나쁜 친구들을 사귀었다. 한 번은 친구들과 배를 서리했다. 중년이 넘은 지금도 그때 도둑질을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다. 시골이지만 훌륭한 선생님들에게 초등·중등 교육을 받았다. 내 자랑을 좀 하자면 내게는 타고난 말솜씨·글솜씨가 있었다. 나는 국어 선생님이 됐다. 우리 마을에서도 가르치고 옆 마을에서도 가르쳤다. 학생들 실력이 신통치 않아 가르치는 재미가 없었다. 똑똑한 제자들을 찾아 배를 타고 멀리 서울까지 진출했다.

나는 16세부터 여색에 빠졌다. 17세 때 한 여인을 만나 동거하게 됐다. 바라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태어났다. 일단 세상에 나온 녀석을 나는 무척 사랑했다. 나를 닮아 똑똑했다. 그 여인과 13년을 같이 살았다. 정식 결혼은 못 했지만 나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런저런 여자들을 어떻게 ‘취(取)했는지’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다. 녀석들은 자랑할 게 떨어지면 무용담을 지어냈다. 나는 친구들과는 달랐지만 “순결과 금욕을 주소서. 지금은 말고요”라고 기도한 적도 있다.

아리 셰퍼(1795~1858)가 그린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어머니 성 모니카’(1846).
출세 꿈꾸다 회심 후 성직자의 길로
어머니는 내가 출세하기를 바랐고, 나 또한 출세에 관심이 있었다. 출세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웬만한 감투는 다 돈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종용으로 내게 아들을 낳아준 내연녀와 헤어졌다. 어머니는 정식 결혼을 하라며 혼처를 구해 왔다. 당장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린 여성이라 약혼만 했다. 나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어떤 여자와 동거에 들어갔다. 몇 년 후 약혼녀와 결혼하고 장인이 준 돈으로 벼슬을 샀으면 나는 꽤 폼 나는 고급 공무원이 됐으리라. 그러나 하느님이 나를 위해 준비한 길은 그 길이 아니었다.

젊었을 때 나는 우리 마을에서 기독교보다 교세가 더 셌던 ‘사이비’ 종교를 믿었다. 점보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내가 그 종교에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은 29세 때 서울에서 만난 주교님이었다. 내가 그 사이비 종교를 믿게 된 이유는 예수의 족보 두 가지가 서로 상충되는 등 기독교 성경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번역본이 아니라 문장 수준도 문제가 있었다.

『고백록』의 한글판(왼쪽)과 1645년 스페인어판 표지.
나처럼 ‘철학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기독교를 믿기 힘들다. 그러나 주교님은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었다. 32세 때 어느 날 정원에서 ‘책을 들고 읽어라’라는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성경책을 펴보니 로마서 13장 13~14절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나는 33세 때 드디어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나는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됐다. 나는 37세에 신부가 됐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나를 신부로 뽑은 것이다. 몇 년 후 42세 때는 주교가 됐다. 당시만 해도 나 같은 과거의 죄인이 신부가 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철학이 나를 하느님에게 인도했지만 내가 하느님과 만날 수 있게 한 것은 그 어떤 수준 높은 철학이나 학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내민 은총이었다.

13장으로 된 『고백록』(401년께)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어머니는 성녀 모니카, ‘아들’은 아데오다투스, 서울은 로마, ‘사이비’ 종교는 마니교, 주교님은 밀라노 주교 성 암브로시우스다.

397~398년 사이에 40대 초반 나이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집필한 『고백록』은 일반적으로 서구 세계 최초의 자서전으로 인정된다. 1~10장은 자신의 삶의 행적, 마지막 3장은 성경에 대한 것이다. 개인적인 내용이 과감하게 삭제돼 있기에 자서전이라고 보는 것은 난센스라는 주장도 있다. 『고백록』은 신(神)에게 바치는 긴 기도, 독백, 성찰, 성경을 비롯한 텍스트를 읽는 독법(讀法) 교과서로 평가되기도 한다. 과장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젊었을 때 성적인 방종에 빠졌으며 그노시스파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불교가 혼합된 마니교를 9년간 믿은 그에게 『고백록』은 자신 신앙의 선명성을 입증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고백록』은 신과 하나가 되고 신 안에서 편히 쉬는 것을 달성한 한 인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회심하기 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마음의 평화를 막는 것은 종교와 철학, 종교와 이성 사이에 있는 거대한 강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놨다. 그리스·로마 철학을 기독교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집대성했다. 이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500만 단어 분량의 책·서한문·강론을 집필했다. 『신국론』(427)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1000년간 규정한 틀이 됐다.

신과 영혼 탐구 위해 거세까지 고려
북아프리카 로마의 속주 누미디아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난 그는 베르베르·로마·페니키아의 피가 흐르는 유색인종이었다. ‘마지막 고대인이자 최초의 중세인’ ‘중세 최고의 철학자·신학자’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의 아버지이자 개신교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확립했다. 종교개혁 기간에는 가톨릭·개신교 측이 모두 그를 인용하며 상대편이 이단이라고 공격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년께~1274)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서구에서 가장 유명한 어머니는 성 마리아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성 모니카다. 성 모니카는 ‘서구의 맹모(孟母)’였다. 맹모가 아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이사를 갔다면, 성 모니카는 아들의 회심을 위해 눈물로써 기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무엇에 대해 알려고 하는가.” 이렇게 답했다. “단 두 가지, 하느님과 영혼.” 그는 한때 거세를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로 신과 영혼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그는 고리타분한 중세 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남자와 여자는 마음과 영혼이 전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남긴 문헌 중에는 ‘이단적’인 내용도 있다. 그는 우주가 6일이 아니라 한꺼번에 창조됐다고 주장했다. 성경 구절을 글자 그대로만 읽을 게 아니라 과학이나 신이 인간에게 준 이성과 모순이 되면 은유법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진보적’인 신학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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