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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금속음이 살가워진 까닭은…

중앙선데이 2013.06.29 23:20 329호 27면 지면보기
바이올린이란 악기는 요술지팡이와 같다. 비정하고 오만한 고가의 보석 같은 느낌을 주는가 하면, 어느 땐 갖고 놀기 좋은 작은 장난감 같은 친근감을 주기도 한다. 이 악기가 들려주는 음악 역시 그렇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 같은 대곡을 너끈히 끌고 나가는 위력을 보이는가 하면, 바치니의 ‘고블린의 춤’ 같은 곡에서는 아기자기한 유희의 극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바이올린의 재발견

나는 한동안 바이올린 소리를 듣지 않고 되도록 멀리하려고 애썼다. 날카로운 금속성 음향이 청각에 거슬렸던 것이다. 소프라노 노래도 역시 같은 이유로 피했다. 당시 주로 듣던 오디오 기기의 품질이 열악해서 그런 증상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다시 바이올린과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났다. 2005년 모스크바 변두리 툴스카야에서 한동안 머무르던 시기다. “저는 바딤 레핀(Vadim Repin, 1971~)을 좋아해요. 그를 닮고 싶어요.” 10 년째 그 도시에서 바이올린 공부를 해온 잘생긴 한국 청년은 내가 묻기 전에 말했다. 그는 내게 아파트를 잠시 빌려주고 여름휴가 기간 가족과 함께 지내기 위해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의욕에도 불구하고 그의 요청으로 잠시 들어본 연주는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방에는 피아노와 작은 컴포넌트가 있고, 수백 장의 CD 음반들이 피아노 덮개 위에 쌓여 있었다. 전부 바이올린 곡들로 하이페츠, 오이스트라흐 등 지난 시대의 명연주자들과 바딤 레핀 등 새 얼굴들의 음반이 고루 섞여 있었다. 한동안 사람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던 나는 뜻하지 않게 종일토록 바이올린 연주 감상에 매달렸다. 자연히 출중한 기량을 보인 바딤 레핀의 연주력에 이끌렸다. 그는 피지컬, 절제된 감수성, 열정 등 삼박자를 갖춘 완벽한 연주자로 지금은 떠오르는 해가 아니고 중천에서 휘황한 빛을 발하는 대스타가 되어 있다.

그날 이후 여기저기서 바딤 레핀의 연주를 찾아 듣다가 갑자기 막심 벤게로프(Maxim Vengerov, 1974~큰 사진)가 또 좋아졌다. 이유는 ‘바이올린의 쇼팽’이라는 폴란드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핸릭 비에냐프스키(Henryk Wieniawski, 1835~1880작은 사진), 그의 작품들 때문이다. 사실은 벤게로프가 좋아서 그가 주특기를 발휘하는 비에냐프스키 곡을 듣게 되었는지, 그 곡이 좋아 벤게로프가 덩달아 좋아졌는지 확실치 않다. 이런 혼란에는 이유가 있다. 벤게로프는 비에냐프스키가 자기의 정신적 스승(요즘 흔히 말하는 멘토)이라고 말하고 있고 실제로 비에냐프스키의 작품들, 특히 ‘화려한 폴러네이즈’ 같은 곡을 연주할 때만큼 벤게로프가 매력 있게 보이고 연주자 본인도 신바람을 내는 경우가 다시 없기 때문이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보인다.

비에냐프스키의 작품은 감상 가이드북 같은 데서 겨우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정도지만 바이올린이란 악기 입장에서 보면 어느 곡 못지않은 대단한 명품이라고 할 만하다. 일급 연주자들이 다투어 협주곡 2번을 비롯해 그의 다른 곡들을 연주·녹음하는 것이 증거다. 후기 낭만에 해당되는 음악에 심각한 주제랄 것은 없다. 다만 아름다운 시정과 멋진 유희가 음악에 넘쳐 흐른다.

비에냐프스키의 음악은 폴란드 민속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MAZOWSZE(마조프셰)’ 같은 음반에서 보여주는 특유의 활기찬 율동과 서정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그는 파가니니가 그렇듯 바이올린 장인의 특기를 살려 이른바 아크로바틱한, 변화무쌍한 작품으로 빚어냈다. 발랄한 춤과 같은 빠른 템포의 교차 이후 뒤따르는 부드러운 서정은 분위기가 독특하고 고귀한 품성을 뽐낸다. 벤게로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up and down’의 돌발변수가 많은 것이 특징인데 벤게로프에겐 이런 변화를 잘 구사해 청중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특출한 능력이 있다. 비에냐프스키 작품을 연주할 때 특히 자주 나타나는 변화무쌍한 표정 연기도 청중을 끌어당기는 무기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그의 얼굴은 피에로, 혹은 가면을 쓴 모습으로 변해가는데 이런 모습은 비에냐프스키 음악에 쏟아내는 열정의 징표로 그 음악과도 썩 잘 어울린다.

비에냐프스키는 비록 폴란드 태생이나 그의 음악적 귀향지는 모스크바란 도시다. 또 하나의 특이한 걸작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의 추억’이라는 작품을 들어보면 그가 대부분의 음악활동기를 보낸 이 도시에 얼마나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 쉽게 느낄 수 있다. 벤게로프와 바딤 레핀은 공교롭게 동향으로 노보시비르스크 출신이며 초기 스승도 같은 인물이다. 벤게로프는 어릴 때 아버지가 오보에 연주자로 있는 그곳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러 가끔 갔는데 아버지가 맨 뒤 구석에 앉아 보이지 않아서 자기는 맨 앞줄에 앉을 수 있는 바이올린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나를 바이올린 곁으로 다시 이끌어주었고 바딤 레핀을 닮은 연주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그 잘생긴 음악도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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