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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94> 97년 총리로 공직 복귀

중앙일보 2013.06.28 00:43 종합 31면 지면보기
1997년 6월 5일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한보철강 특혜 대출 비리 의혹과 관련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및 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이날 심재륜 대검 중앙수사부장(가운데)이 대검청사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7년 2월 말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1년 전처럼 청와대 집무실에 마주 앉은 김 대통령이 말을 꺼냈다.

임기 말 YS "총리 맡아 한보 사태 수습해 달라"



 “국무총리를 맡아 한보 사태 위기 정국을 수습해 주세요.”



 임기 말에 접어든 김영삼정부는 한보 사태로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한보그룹과 나의 악연은 질겼다. 한보 때문에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났던 나는 7년이 지나 한보 때문에 총리 자리를 제안받았다. 나는 한보 사태를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제안을 사양하자 김 대통령은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두 번을 강조했다.



 명지대 총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때였다. 교수와 학생 앞에서 약속한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건부로 수락했다.



 “총리가 내각을 통할하려면 국무위원 해임 제청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거 뭐 어렵나.” 김 대통령은 즉석에서 내 의견을 받아들여줬다.



 “국회 회기를 감안하면 일주일 정도 시간이 더 있습니다. 더 좋은 사람을 물색해보시고 그래도 제가 필요하시다면 연락을 주십시오.”



 3월 5일 나는 총리로 취임했다. 7년 만에 돌아온 공직이었지만 기쁜 마음은 없었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했다. 한보철강 특혜 대출을 둘러싼 비리 의혹은 김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김 대통령에게 독대를 청했다.



 “이미 문종수 민정수석을 통해 보고드렸지만 언론이나 일반 국민들이 현재의 검찰 수뇌부에 신뢰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을 바꾸긴 했지만 검찰총장, 중수부장 모두 한보 정태수 회장과 같은 영남 사람이란 선입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검찰총장은 임기를 지켜주는 게 맞겠고, 대신 중수부장을 교체하는 방안을 가납해주시면 검찰 수사진의 신뢰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의 말에 김 대통령은 한동안 침묵했다. 대통령도 나도 중수부장 교체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아들을 구속 수사하겠다는 뜻이었다. 김 대통령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게 하세요.”



 최상엽 법무부 장관을 총리 집무실로 불러 상의했다.



 “이렇게 가서는 한보 사태가 수습이 안 됩니다. 중수부장을 교체할 수밖에 없습니다. 검찰 최고의 수사통이 누굽니까.”



 “인천지검에 심재륜이라고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으로 바꾸세요. 책임은 제가 집니다. 국무회의 때 내가 직접 지시를 하는 형식을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3월 18일 국무회의에서 나는 준비한 대로 최 장관에게 지시했다.



 “국민들은 한보 사태 등 일련의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가 미흡하며, 내각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의혹을 불식시킬 수 있도록 사람을 바꿔서라도 철저한 수사 노력을 기울여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김 대통령의 재가도 받았고 최 장관과도 미리 말을 맞춰둔 상태였다. 전말을 알 리 없는 언론은 ‘총리가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 재수사를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라며 대서특필했다.



 3월 23일 법무부는 심재륜 인천지검장을 대검 중수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 칼날 같은 수사를 벌였다. 두 달 후인 5월 17일 검찰은 김현철씨를 구속했다. 그렇게 한보 사태의 고비 하나를 넘겼다.



 그런데 아들이 구속되고 나서부터 김 대통령이 불면증을 앓았다. 총리로서 매우 곤혹스러웠다. 내 책임이 컸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서울 삼청동 총리관저에서 김 대통령을 비롯해 5부 수뇌가 참석하는 부부 동반 만찬을 열었다. 만찬이 열리기 전 오후 청와대 의전실에 물었다.



 “어떻게 하면 오늘 대통령께서 주무시겠나. 술은 뭘로 했으면 좋겠나.”



 김 대통령은 원래 술을 즐기진 않았다. 와인 ‘마주앙’을 몇 잔 하는 정도였다. 그날만큼은 주무실 수 있도록 도수가 높은 술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미였다. 의전실 담당자는 내 말 뜻을 금방 알아챘다.



 “‘우량예(五粮液)’로 하면 어떨까요.”



 그의 제안대로 도수가 높은 중국술 우량예를 만찬 석상에 올렸다. 만찬 분위기는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우량예 서너 잔을 마셨다.



 다음 날 청와대 부속실에 물었더니 “대통령께선 잘 주무셨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후 김 대통령은 아침에 조깅을 하지 않고 대신 오후에 수영을 하며 불면증을 고쳤다고 전해 들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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