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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에선 다 보인다죠 배우가 어떻게 사는 놈인지 그러니 자~알 살아야죠

중앙선데이 2013.06.22 01:28 328호 16면 지면보기
지난해 7월. 고두심의 연기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댄스레슨’을 찾은 관객의 호기심은 한 젊은 남자에게 쏠렸다. 탱고·폭스트롯 등 6가지 춤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대선배 고두심을 리드하는 한편, 절제된 연기로 동성애자의 애환을 따뜻하게 풀어내며 감칠맛을 더한 배우 지현준(35)이었다. 2011년 한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 바이올린을 켜며 탱고를 추던 그 ‘10년차 연극배우’다.

1인 35역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의 지현준

배우가 악기까지 연주하는 액터뮤지션 뮤지컬 ‘모비딕’에 캐스팅돼 2012 더뮤지컬어워즈 신인상을 단박에 거머쥐고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에 잇따라 출연하며 대중에게 바싹 다가섰던 그가 다시 연극무대로 돌아왔다. 연극으로 사회에 화두를 던지겠다는 두산아트센터의 ‘두산인문극장’ 올 시즌 마지막 무대 ‘나는 나의 아내다’(29일까지 두산아트센터)를 통해서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지만 여장까지 마다않는 이 연기 고수의 모노드라마를 보러 온 관객들로 250석 소극장은 연일 매진사례다. 남성호르몬이 뚝뚝 떨어지는 외모에 단정한 검정 원피스를 입고 진주목걸이를 길게 두른 부조화로 그는 무엇을 보여주려는 걸까.

이 남자, 천생 광대다. 얌전한 할머니와 젊은 게이, 터프한 사내 등 무려 1인 35역을 두 시간 동안 자유자재로 오가며 객석을 들었다 놨다 한다. 삶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진지한 작품인데도 숨가쁜 개인기 신공에 관객들은 개그콘서트라도 보는 양 자지러진다. 그러다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인물 속으로 마법처럼 빨려든다. 작품은 2003년 뉴욕에서 초연돼 퓰리처상·토니상·드라마데스크·오비상 등 각종 연극상을 휩쓴 최고의 작품성을 자랑하지만, 분장이나 의상의 활용 없이 온전히 연기만으로 변신하는 이 특별한 원맨쇼엔 분명 배우가 작품 꼭대기에 있었다.

모노드라마 ‘나는 나의 아내다’
-35명 연기를 위해 준비도 남달랐겠다.
“한두 달 준비하는 보통 작품과 달리 5개월 동안 연습했다. 처음엔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 내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점점 내가 삶에서 진짜 만났던 사람들을 찾게 되더라. 그들을 만난 내 느낌을 끌어내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많이 돌아 왔다.”

-모노드라마라 외롭진 않나.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게 됐다. 혼자 무대에 오른다고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무대 뒤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연극과 무대에 대해서 또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한 실존 인물의 취재기록을 바탕으로 한 이 다큐멘터리 연극의 주인공은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샬롯. 비틀린 성 정체성에 관한 드라마가 아닐까 싶지만, 여장 남자는 나치 치하와 독일 사회주의, 통독 후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며 어떤 이념에도 속하지 못했던 주인공의 삶을 은유할 뿐이다. 샬롯은 어린 시절 나치당원 아버지를 죽이고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당당히 여장을 하고 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 독일의 훈장까지 받지만, 비밀정보원 경력을 의심받자 훌쩍 이민을 떠나버리는 수수께끼의 인물. 그는 체제에 맞서 주체적인 삶을 개척한 인물인가, 혹은 그렇게 감쪽같이 위장한 체제의 앞잡이였을 뿐인가. 이것은 한 인물의 다면성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한 사람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끝까지 정체가 모호한 역할을 어떻게 해석했나.
“참 답이 없었다. 한 사람의 삶을 그저 진열대 위에 늘어놓을 뿐, 그를 표현하면서도 그가 누구라고 답을 줄 수 없는 지점을 가져야 하는 정말 특별한 작품이다. 뭘 전해야 되겠다는 범위가 없고, 관객에게 뭘 받아가라고 한정 지을 수 없다. 우리가 늘어놓은 것을 보고 관객이 바깥의 것까지 상상해야 하는 부분이 매력인 것 같다.”

-본인도 연극이나 뮤지컬 한쪽으로 한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묘하게 다른 두 장르가 양쪽에서 나를 채워준다. 양쪽에 걸쳐 있는 배우가 많지 않은 만큼 한번 잘 섞어보려 한다. 뮤지컬 하면서 당장 욕을 먹더라도 연극적인 부분도 놓지 않고 싶고, 반대로 연극에 와도 그런 게 생긴다.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연기의 깊이도 더 채우려고 노력 중이다.”

-화려한 뮤지컬 무대에 서다 보면 연극으로 돌아오기 쉽지 않을 텐데.
“가난이 연극의 매력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지 연극을 하면 알게 된다. 정신이 좀 가난해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풍족할 때는 생각을 잘 안 하게 된다. 연극은 항상 나를 좀 가난하게 해주고 그 덕에 내 뿌리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물론 힘든 면도 있다. 관객도 적고 외로운 기분도 들고. 그런데 사람이 외로움을 느끼는 게 정상이고, 사람을 정상적으로 데려다 놓는 것 같아서 좋다. 숨 쉬는 것의 의미까지 찾게 되고 내가 살아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순수예술은 그런 힘이 있는 것 같다.”

방송 출연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사실 지현준은 연극계 거장 이윤택 연출이 이끄는 극단 연희단거리패에서 10년 동안 잔뼈가 굵은 정통 연극배우다. 대학에서 다큐멘터리 연출을 전공하고 방송사에 들어갔지만 “60살이 돼서도 행복할 수 있는 직업이 배우인 것 같아서” 무작정 이윤택 연출을 찾아가 밑바닥부터 연극을 배웠다. ‘햄릿’‘서푼짜리 오페라’‘아미시프로젝트’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2010년에는 루마니아에서 열린 햄릿 페스티벌에 국가대표 햄릿으로 나서 독일·러시아 햄릿과 함께 루마니아 크라이오바 국립극장의 미차 코르니슈타누 총감독이 뽑은 가장 인상적인 햄릿으로 꼽히기도 했다.

-오랜 무명생활이 힘들진 않았나.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 무대 앞면보다 무대 뒷면부터 보기 시작했다. 배우들이 무대 앞에선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무대 뒤에선 정말 평범하고 심지어 누추하기도 하다. 가진 게 없으면서도 뭔가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먼저 보고 시작했기 때문에 힘들단 생각은 안 해봤다. 그저 매일 만나서 좋건 싫건 부대끼면서 하는 게 마냥 좋았다. 서로 부딪치기 싫어도 부딪쳐야 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분명히 있다. 요즘엔 부딪치기 싫으면 피하고 안 만나고 전화만 하면 그만인데, 연극은 일단 서로 만나야 되고 싫어도 손잡고 맞춰봐야 하니까. 그런 무대의 아날로그 정신은 놓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결국 방송에 도전했다.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셨을 땐데, 어려서부터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셨다. 학원을 일곱 개씩 보내며 공부시킨 아들이 연극하는 걸 보면서 9년 동안 한 번도 반대하지 않던 어머니가 쓰러지시더니 날 붙잡고 ‘너 TV 한 번만 나오면 안 되겠니’ 하시는데, 9년 동안 지하실에서 생판 모르는 관객을 위해 뒹굴면서 정작 곁에 있는 어머니를 위해 한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 자존심만 세울 게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연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방송 나가니 고혈압이 싹 나으셨다.(웃음)”

-돌아보면 어떤 의미였나.
“연기가 박살나는 계기가 됐다. 연극만 하며 살았던 놈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갖고 있던,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 내 세계 안에서만의 연기가 깨졌다. 거기 안 나갔으면 안 깨졌을 거다.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연기도 할 줄 알아야 되는데 괜히 폼 잡는다고 잘하지도 못하면서 어려운 연기만 신경 쓰고 있었구나. 그렇게 박살이 나니 남의 얘기가 들리기 시작하고, 시야가 넓어지더라. TV 연기자건 누구건 다른 사람이 해주는 얘기는 일단 들어야 되는 것 같다. 새로운 건 내 안에 없고, 항상 밖에 있더라.”

-그렇게 업그레이드된 연기력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나.
“연극의 경우엔 늘 고전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뮤지컬이라면 보통 인간과는 뭔가 좀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 인간과 로봇 사이 사이보그 같은 존재나 뱀파이어도 좋겠다. 정말 제대로 된 드라큘라를 해보고 싶다. 1000년을 산 사람이 가진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연극 외에 현대무용단에서 3년간 수련하며 프로무용수로도 적지 않은 무대를 밟았던 그는 7월에는 미술관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는 특이한 이력을 더할 예정이다.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재독 미디어 아티스트 최찬숙의 개인전 ‘90억 가지 신의 이름’에서 작가의 영상·설치 이미지와 어우러진 45분짜리 공연을 4회에 걸쳐 주도하는 것. 9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 ‘빠스켓볼’ 촬영도 병행 중이다.

연극·뮤지컬·무용에 미술·방송까지 전방위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그에게 목표를 묻자 “잘 사는 것”이란다. 무슨 뜻일까. “지금껏 연기를 하려고 많이 발버둥쳐 왔어요. 춤도, 악기도, 운동도, 노래도 그래서 배웠죠. 그런데 그런 테크닉은 하나의 무기일 뿐, 그것만으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란 걸 이번 작품을 통해 알게 됐어요. 35명을 연기하기 위해 제가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필요했듯, 앞모습만 신경 쓰는 배우에게 뒷모습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죠. 처음 연기 시작할 때 이윤택 선생님이 제 연기 딱 한 장면을 보고 ‘넌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연기가 안 되는 거다’라고 하신 말씀에 깜짝 놀랐었는데, 이젠 저한테도 보여요. 관객들에게 보이는 모습엔 그 배우가 살고 있는 뒷모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 사는 대로 캐릭터도 해석하는 거니까. 무대 뒤에서 훨씬 잘 살아야 앞모습까지 책임질 수 있으니, 잘 사는 게 목표일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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