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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 년을 오가는 음악 시간여행 오감으로 느끼다

중앙선데이 2013.06.22 01:44 328호 24면 지면보기
무소르그스키가 화가 친구의 유작 전시회를 보고 작곡한 ‘전람회의 그림’. 이 작품 속에는 그림 10점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림 말고도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게 있으니 ‘프롬나드’다. 프롬나드는 ‘산책’이다. 그림과 그림 사이를 걷는 발걸음이다. 프롬나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람회의 그림’이 단지 그림의 나열에 그치는 것을 막는다. 유기적인 체험으로 재구성해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임선혜 & 아카데미 오브 에인션트 뮤직, 18일 예술의전당

18일 오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아카데미 오브 에인션트 뮤직(이하 AAM)의 공연을 보면서 ‘전람회의 그림’과 ‘프롬나드’가 떠올랐다. 2년 만의 내한공연 첫날 프로그램은 비발디 ‘사계’와 소프라노 임선혜가 노래한 퍼셀 ‘요정 여왕’, 헨델 ‘올란도’‘에치오’ ‘줄리오 체자레’ 중 아리아였다. ‘사계, 자연의 소리와 시’란 제목을 붙인 이날 공연은 이들을 하나의 더 큰 작품으로 만들었다. 비발디 ‘사계’를 연주하며 소네트를 낭송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신한 시도였다.

무대 위에 16명의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고음악 음반들에서 자주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파블로 베즈노시우크가 악장을 맡았다. 제 1바이올린과 제 2바이올린 각각 4명, 비올라와 첼로 각각 2명, 더블베이스와 아치 류트, 쳄발로 주자들로 구성됐다. 거트현을 사용하는 원전연주 단체답게 오랜 시간 튜닝에 공을 들였다. 튜닝하는 소리가 예쁘고 귀에 거슬리지 않아 신기했다.

베즈노시우크는 큰 몸짓으로 비발디 ‘사계’ 중 봄 첫 부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현은 날카롭지 않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2악장 라르고에서 악장의 바이올린은 비올라와 대화하면서 즉흥적인 장식음을 많이 사용했다. 3악장에서는 베즈노시우크의 음 이탈이 귀에 거슬렸지만 3악장을 마치고 악장은 비올라 주자를 일으켜 세웠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소프라노 임선혜가 등장했다. 헨리 퍼셀의 ‘요정 여왕’ 중 ‘이처럼 기분 좋은 밤’은 엔드핀 없이 다리로 지탱해 연주하는 바로크 첼로와 기다란 아치 류트 사이에서 그녀의 고음이 반짝였다. 맑고 간절한 ‘화려한 들판을 보라’에 이어 연주곡인 ‘밤의 추격자들의 춤’이 이어졌다. ‘보라, 밤의 여신마저 여기 왔도다’에서는 아름답게 떨리는 가창과 특유의 시선 처리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임선혜가 들어간 사이 연주된 ‘여름’은 촉촉한 프레이징의 2악장도 좋았지만, 완급을 자유자재로 조절한 3악장이 돋보였다.

다시 임선혜가 등장해 헨델의 ‘올란도’ 중 ‘사랑은 바람처럼’을 불렀다. 그녀는 과유불급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표현은 풍부하되 결코 과장하거나 그 이상 오버하지 않았다. 그녀의 비브라토는 일부러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맥주의 거품처럼 자연스럽게 노래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막바지에 기교가 빛나던 순간 객석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려 안타까웠다. 첼로의 사라 맥마흔은 그녀의 노래 위에 올라타고 연주하는 듯했다. 음악에 몸을 움직이며 앙상블을 만들었다.

휴식시간 뒤 ‘가을’을 의식한 듯 낙엽 분위기의 드레스를 입고 나온 임선혜는 헨델 오페라 ‘에치오’ 중 ‘산들바람이 부드럽게’를 불렀다. 베즈노시우크는 가끔씩 임선혜의 노래를 입 모양으로 따라 불렀다. 임선혜는 풍부한 표정으로 깔끔한 뒷맛을 남기는 신선한 가창을 들려주었다.

‘사계’ 중 ‘가을’이 연주됐다. 정교하지 못한 합주의 순간이 보이기도 했는데 고요한 피아니시모로 다이내믹을 움츠리는 부분은 흔히 들을 수 없는 앙상블이었다.

이제 겨울을 의식한 듯 임선혜가 은색과 붉은색으로 이뤄진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마지막 노래는 헨델 ‘줄리오 체자레’ 중 아리아 ‘폭풍 속에서’였다. 임선혜의 고음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겨울’은 유명한 2악장의 템포가 매우 빨라 이색적이었다. 마지막 악장 도입부에서 베즈노시우크가 재채기를 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우연이었겠지만 겨울이라는 점을 더 부각시킨 작은 해프닝이었다.

앙코르는 임선혜에게 무게중심이 쏠렸다. 다시 요정 여왕 같은 분홍 드레스를 입고 나와 비발디 ‘사계’ 중 봄 1악장에 가사를 붙인 버전으로 노래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앙코르는 헨델의 ‘울게 하소서’였다. 임선혜는 기름기를 쏙 뺀 듯 투명한 가창으로, 너무나 유명한 이 작품을 새롭게 조명했다. AAM의 시대악기와 어우러진 임선혜의 목소리는 몇 백 년을 오가는 음악적 시간여행이 가능할 수 있음을 오감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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