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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디지털의 치명적 유혹 … 포퓰리즘을 경계하라

중앙일보 2013.06.22 00:23 종합 23면 지면보기


거대 권력의 종말

니코 멜레 지음

이은경 외 옮김, RHK

367쪽, 1만5000원




디지털 시대가 가져오는 극적인 변화, 그 속에서 펼쳐지는 희망과 절망, 그리고 기회와 위협. 줄잡아 십 수년 동안 이러한 주제의 담론이 얼마나 많이 명멸했을까. 그럼에도 최근 들어 우리가 체감하는 현실은 분명 심상치 않다. 디지털 시대가 약속하던 밝은 미래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으며, 급변하는 국가·사회·산업 질서 속에서 갈피를 못 잡는 많은 이들의 불안감이 갖가지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미디어 환경은 이러한 모습이 가장 극명히 드러나는 현장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요 방송과 몇몇 거대 신문이 언론을 지배했지만, 이제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들고 포탈의 뉴스 메뉴, SNS의 기사 링크를 뒤적이거나 지난 밤 놓친 드라마와 영화에 탐닉하는 시선만 남았다.



 선거와 정치 풍경도 크게 달라졌다. 갈수록 사회 전체가 디지털 여론에 민감해지고 있다. 이처럼 과거를 지배해왔던 거대한 기관, 즉 언론·정당·정부·기업·학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질서는 심각한 존속 위기에 봉착해 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IT 미래학자 니코 멜레 교수가 쓴 이 책(원제 The End of Big)은 우리에게 익숙했던 거대한 존재와 가치의 퇴락과 그 공백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조망하고 극복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왜 하필 디지털 시대는 이런 거대한 존재들에게 치명적인 것일까. 저자는 흥미롭게도 그 해답의 하나로 디지털 시대의 창안자들이 품었던 ‘의도’를 상기시킨다. 과거 빌 게이츠·스티브 잡스 등의 선구자를 태동한 1960~70년대는 반전운동과 히피문화가 들끓었다. 거대화된 정치·산업구조에 반감이 컸던 이들에게는 거대기관이 독점한 컴퓨팅 파워를 분산시켜 개인에게 선사해주는 것도 중요한 ‘해방’운동의 하나였다.



 그런가 하면 디지털 시대의 또 다른 핵심축인 인터넷도 초거대강국간의 무지막지한 핵공격에도 살아남을 유연하면서도 견고한 통신망을 만들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PC 같은 개인 디바이스와 인터넷의 결합은 결국 과거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강렬한 급진적인 연결(radical connectivity)을 낳는 원천이 됐다.



 그렇다면 디지털 기술이 개인에게 부여한 힘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가. 우리는 이제 미세한 개인과 작은 커뮤니티에 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멜레 교수가 이러한 흐름을 일방적으로 찬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급격한 기술변화에 의지한 파괴력이 자칫하면 보존해야 할 우리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할 수도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다.



 예컨대 디지털 기술 덕분에 누구나 쉽게 낮은 비용으로 뉴스를 생산 전달할 수 있게 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새롭고 다양한 언론 매체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멜레 교수는 “새로운 언론 조직들이 거대 매체가 전성기 때 수행했던 사회적 책임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고 말한다. “새롭게 등장한 매체들이 감시자로서의 역량을 갖추도록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면 민주제도의 부패와 타락하고 부도덕한 선동가의 등장을 막지 못하는 뉴스의 홍수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진지한 저널리즘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좀 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진지한 대안 언론이 등장해야 하며, 과거의 거대 언론기관 또한 개방적인 네트워크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정치 영역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이데올로기는 권력층에 대한 반사적인 불신과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끊임없는 외침, 즉 반(反)기득권주의다”라는 뉴욕타임스의 지적이 한국인의 폐부에도 꽂히는 현실이다.



 멜레 교수는 급진적 연결이 정치 신인에게 놀라운 기회를 주지만, 동시에 포퓰리즘으로 대중을 현혹하며 영향력을 키우는 대표성 없는 후보가 나올 위험도 높아짐을 경고하고 있다. “당파를 떠나 모든 시민들이 나서 창조성을 발휘”하여 “보편적인 가치와 급진적 연결의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다소 평범하게 들리지만 그 울림은 결코 작지 않다.



 과거를 지배해온 거대한 존재와 새롭게 부상하는 오밀조밀한 존재가 균형 있게 공존해야 할 미래. 이 책에 담긴 멜레 교수의 성찰도 이러한 미래에 대한 해법을 명쾌하게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독자들을 그 고민의 현장으로 잡아 끄는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한다. 특히나 그가 주한 미대사관에 근무하던 부모를 따라 연희동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냈다는 이야기 등 남다른 한국과의 인연이 행간에서도 느껴지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책을 덮으며 문득 영국의 소설가 H G 웰스의 말이 떠올랐다. “과거의 오랜 진보는 우리의 절망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의 고민은 절망의 서막이 아니라 기회의 열쇠가 되리라 믿어본다.



채승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채승병  KAIST(한국과학기술원) 통계물리학 박사. 2006년부터 삼성경제연구소 산업전략1실 복잡계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공저 『빅데이터, 경영을 바꾸다』 『변신력, 살아남을 기업의 비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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