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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집행정지 한 해 300명꼴 … 대부분 제도 악용 ‘합법탈옥’

중앙일보 2013.06.19 02:15 종합 1면 지면보기
“한보그룹 비리사건 수사 때 정태수 당시 회장이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기 위해 실어증에 걸린 척을 했다. 난 직감으로 거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의사들은 틀림없다고 했다. 범죄자가 의사나 검사를 속이는 건 쉽다.”


[이슈추적] 부와 권력의 특혜수단으로

 대검 중수부장 때 한보그룹 비리를 수사 지휘했던 심재륜 변호사는 “구속 과정에 비해 형 집행정지가 너무 손쉽게 결정된다”고 지적했다.



90%가 병 내세워 외부 병원생활



 실제로 대법원에서 징역 15년이 확정돼 복역 중이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2002년 대장암 등 진단을 받고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하지만 곧 숨질 것 같았던 정 전 회장은 강릉 영동대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2심 재판 도중 출국해 지금까지 해외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



 형 집행정지는 건강이 극히 악화된 수형자를 일시적으로 석방해 병 치료를 받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가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의 ‘합법적 탈옥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심의위원회도 안 열고 연장 결정



 여대생 청부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중견기업 회장 부인 윤모(68)씨는 최근 형 집행정지를 계속 연장하며 4년여간 대학병원 특실에서 호화생활을 해온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윤씨는 유방암·파킨슨병 등 무려 12종의 무시무시한 병을 진단받았지만 형 집행정지 기간 중 20여 차례 외출·외박까지 했다. 그는 형 집행정지 연장을 받을 때 외부전문가가 포함된 형 집행정지 심의위원회의 심의조차 받지 않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71)씨도 마찬가지다. 2010년 5월 대법원에서 사기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전씨는 판결 후 3년여가 지났지만 자신의 형기를 1년밖에 채우지 않았다. 나머지 2년간은 뇌경색을 이유로 형 집행정지를 받고 분당의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형 집행정지는 계속 연장됐지만 지난해부터 심의위원회는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형 집행정지 대상자를 점검하는 것은 몇 개월에 한 번씩 확인하는 것이 전부다. 그 사이에 입원해 있는지, 외부에 돌아다니는지 알 길이 없다.



유력 인사들 이 기간에 사면까지



 대검찰청에 따르면 매년 300명 정도의 수형자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다. 지난해에는 290명의 형 집행이 정지됐고 올해도 지난 3월까지 64명이 교도소 밖으로 나왔다.



 형 집행정지 대상자들 가운데는 유력 인사가 많이 포함돼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집행정지 기간에 특별사면을 받아 특혜 논란까지 일고 있다. 특사를 받으면 건강이 회복될 경우 복역해야 하는 잔여 형기를 채우지 않아도 된다. 주광덕 전 한나라당 의원이 2009년 대검찰청 국정감사 당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박지원 민주통합당 의원,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용채 전 건설교통부 장관 등이 형 집행정지 중 특별사면을 받았다.



 의사 진단서에만 의존해 형 집행정지를 판단하는 과정도 불투명하다. 명문대 의대를 중퇴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김모(47) 변호사는 교도소 수용자들에게 “의대를 졸업한 내가 형 집행정지 명령을 받아줄 수 있다”고 홍보해 5000만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로 2010년 기소됐다. 교도소 의무과장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한편 로비를 통해 외래 지정병원으로부터 중병 상태라는 진단서를 발급받게 해줄 수 있다고도 했다. 같은 해 인천지법은 김 변호사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했다.



지난해 대전지검 천안지청 송한섭 검사는 부인을 살해한 김모(59)씨가 식물인간 행세를 하며 20년간 형 집행정지를 받아온 사실을 확인, 재수감 조치했다. 송 검사는 의사 출신이다.



 형사소송법은 형 집행정지 사유로 일곱 가지를 적시하고 있다. ‘연령이 70세 이상인 때’ ‘임신 6개월이 지난 때’ ‘출산 후 60일을 경과하지 아니한 때’ ‘형의 집행으로 인해 현저히 건강을 해하거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을 염려가 있는 때’ 등이다. 하지만 90% 이상은 질병으로 인한 형 집행정지다.



 형 집행정지 결정 경험이 있는 법조인들은 “의사의 진단서가 결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고 입을 모은다. 담당 검사 입장에서는 의학적 전문지식이 없는 만큼 전문의의 진단서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검사 출신인 한국외대 이창현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수감생활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아프거나 치료받지 않으면 사망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형 집행정지 결정을 한다”며 “전문의가 곧 죽을 것 같다고 강력하고 험악하게 얘기하는데 이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문제의 소지가 발생한다. 재력, 권력이 있는 수용자들이 의사와 짜고 가짜 진단서를 제출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도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형 집행정지를 신청할 때 최소 2명 이상의 외부 병원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도록 하고 검찰 조직에 의사 출신 검사들을 두자는 것이다. 허위진단서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법무법인 세종의 홍탁균 변호사는 “형 집행정지 연장을 받는 것은 중병이라는 의미인데 몇 년씩이나 연장을 받는 것은 상식적으로 의심이 간다”며 “최소한 연장을 여러 번 받는 이들에 대해선 불시에 점검을 실시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이목희 민주당 의원은 이른바 ‘사모님 방지법’으로 불리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현행 법에는 형 집행정지에 관한 허가를 소속 검사장에게만 부여하고 있다. 검사장의 자의적 판단으로 인해 부정 또는 권한남용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의원은 “종합병원 이상급 의사 2명 이상의 일치된 소견을 받고 검찰 내부 조직인 ‘형집행정지심사위원회’를 법무부 소속으로 격상해 전문성·투명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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