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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욱의 과학 산책]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정신병인가?

중앙일보 2013.06.18 00:46 종합 28면 지면보기
조현욱
객원 과학전문기자·코메디닷컴 편집주간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정신질환인가? 지난달 미국 정신의학회가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5차 개정판을 펴낸 후 계속되는 논란이다. 사별에 따른 슬픔은 ‘주요 우울 장애’, 청소년의 울화통은 ‘파괴적 기분조절 장애’, 잡동사니를 모아두는 습성은 ‘저장 장애’, 과식은 ‘과식 장애’, 약간의 건망증은 ‘가벼운 신경인지 장애’로 진단하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지난 4차 개정판(1994년)의 실무팀장을 맡았던 앨런 프랜시스 박사까지 나서 “정상적인 고통이나 행태를 새로이 의학적 질병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인 것이 자녀나 배우자의 사망으로 인한 비탄이다. 4차 개정판은 슬픔, 고뇌, 불면증, 집중력과 식욕 저하 등의 증상이 2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으면 ‘주요 우울장애’로 진단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이 기간은 이번에 2주로 단축됐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파괴적 기분조절 장애’도 마찬가지다. 6~18세로서 폭발적으로 분노를 터뜨리는 말이나 행동을 주 3회 이상 반복하면서 평소에도 거의 항상 화가 나 있는 상태가 1년간 지속되면 진단이 내려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장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행태라는 것이 비판의 골자다. 개정판에선 진단체계도 일부 바뀌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비롯한 4종류의 자폐 관련 질환은 ‘자폐 범주성 장애’라는 하나의 진단명으로 통합됐다. 기존 병명이 없어지는 대신 사회적 문제의 심각성, 관심의 제한성, 반복적 행위의 정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게 된다. 문제는 이 같은 개정을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가 있느냐는 점이다. 영국 국립정신보건센터의 소장인 닉 크래독 교수는 “새 시스템을 도입할 만큼 1994년 이래 과학이 충분히 진보했다고 믿지 않는다”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상을 약간 비틀어서 조금 다르게 만든 것이 개정판의 본질”이라고 비판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15년 펴낼 ‘국제 질병 분류’ 11차 개정판은 미국의 편람과 다른 길을 갈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달 의학저널 ‘랜싯(Lancet)’에 따르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진단에 필요한 증상 수를 줄이고 비참한 사건을 거듭 당하는 데 따른 정신질환을 추가할 예정이다. 저개발국에서 지역 분쟁이나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희생자를 돕기 위한 맞춤형 개정이다. 그렇다면 서방도, 저개발국도 아닌 한국 사람을 위한 맞춤형 편람도 필요하지 않을까.



조현욱 객원 과학전문기자·코메디닷컴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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