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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헤이트 스피치 방치는 일본의 수치

중앙일보 2013.06.18 00:40 종합 29면 지면보기
김현기
도쿄 총국장
16일 오후 일본 도쿄 신주쿠의 오쿠보(大久保) 코리아타운 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반한 운동을 펼치는 우익단체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 200여 명과 이에 반발하는 300여 명의 일본인 시민세력이 충돌, 8명이 체포됐다. 주먹다짐 끝에 얼굴에 피를 흘리는 시민들, 차도 일부를 장악한 채 확성기로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는 우익단체 회원에게 “너희들이야말로 일본의 수치”라고 맞받아치는 인도의 시민세력이 뒤엉켰다. 그동안 반한 시위를 주도해 온 재특회의 다카다 마코토(41) 회장이 시민세력 중 한 명의 멱살을 잡고 침을 뱉어 체포되기도 했다. 일본 경찰 400여 명이 출동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올 들어 이곳에서만 열 번 넘게 우익단체들의 반한 시위가 이뤄졌다. 이쯤 되면 고질적이다. 어떻게 이런 단체가 주말 백주대낮에 코리아타운을 활개치고 제멋대로 떠들게끔 놔둘 수 있는 것일까.



 일본 경찰은 “사전에 집회 목적과 시위 코스를 신고하면 시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안전상 시위 장소를 바꿔달라”는 주일 한국대사관의 거듭된 요청도 묵살한다. 시위의 자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위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특회는 과거에도 “거리의 여러분, 조선 여성을 강간하라”는 구호를 버젓이 외쳤다. 16일 시위대가 들고 있는 피켓을 유심히 보니 ‘5만 명의 매춘부들이여, 지금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라’ ‘오지 마라, 돌아가라, 죽어라’ ‘조선인 모두 죽여라’ 등의 섬뜩하고도 구역질 나는 것들뿐이었다. “한국은 바퀴벌레”라며 태극기를 파리채로 쳤다. 이건 시위 구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악질적인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인종·성·종교 등에 대한 증오 섞인 발언)’다.



 두 달 전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CESCE)는 일본 정부에 대해 “헤이트 스피치에 의한 모욕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는 공식 견해를 발표했다. 유엔 고문방지위원회도 일본 정부의 즉각적이고 실효적인 법적·행정적 조치를 촉구했다. 국제기구의 강제성 없는 권고 사항이라고 하지만 가입국인 일본은 이를 존중할 의무를 갖는다.



 헤이트 스피치를 금지하는 입법을 조속히 하지 않으면 우익단체-주일 한국인 간 물리적 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형식논리에 매달려 ‘나 몰라라’로 일관하면 일본은 인종차별을 방치, 방조하는 국가란 오명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주일 한국인 사회도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일 정부가 ‘법대로’를 외친다면 시위로 인한 영업손실, 정신적 피해 등을 ‘법대로’ 소송을 통해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할 때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김현기 도쿄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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