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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용감한 준표씨

중앙일보 2013.06.18 00:31 종합 31면 지면보기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홍반장이 드디어 일을 냈다. 실세의 부상에 떼밀려 퇴진해야 했던 새누리당 전 대표, 거침없는 화술로 공적을 양산했던 겁 없는 정치인 홍준표가 격투기 도전장을 내밀었다. 대회 이름은 ‘경남 공공의료 타이틀 방어전’, 그가 지명한 챔피언은 격투기 고수 민노총이 코치를 맡은 전국보건의료노조다. 도전자 홍반장은 나 홀로 선수다. 잡음을 싫어하는 청와대는 관전 중이고, 복지부 장관은 불똥이 튈까 두려워 내려오라고 다그치고 있다. 거기에 보건의료노조와 진보단체가 응원군을 한가득 태운 생명버스를 파견할 예정이라니, 간 큰 홍반장, 난처하게 됐다.



 용감한 준표씨, 뭐든 조심조심 짚고 가는 현 정권에서 일단 싸움을 걸었다는 사실이 반갑다. 물론 ‘닥치고 공격!’이 능사는 아닐 테지만 일단 싸워야 뭐가 문젠지, 누가 진짜 선수인지를 가려낼 수 있지 않은가. 누적적자 279억원, 지난해 한 해만 69억원 적자를 낸 진주의료원, 그냥 뒀다가 떠나면 그만인 것을 까탈스러운 홍반장이 참을 리 없었다. 적자에 허덕이는 전국 34개 지방의료원들도 5년간 1조원에 가까운 혈세로 버티고 있는 판에 유독 홍반장만은 ‘폐쇄’라는 강공을 선택했던 것이다.



 무상의료에 목숨을 걸었던 민주당은 놓칠세라 국정조사권을 발동했다. ‘공공의료 사수’라는 명분에 딴죽을 걸었다간 유권자들에게 찍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새누리당 의원들도 슬며시 동조하는 분위기고, 민노총은 오랜만의 출전 준비에 들떠 있다. 도백(道伯)의 고유 권한임을 내세워 국정조사 출석 요청을 거부한 홍반장은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불쌍한 홍반장, 그러나 이참에 공공의료가 파산 위기에 몰린 이유를 낱낱이 국민들에게 알려주기를 희망한다. 실패하더라도 그게 정치의 정도이고, 정치인의 도리다.



 정의감이 충만한 ‘공공의료 사수!’는 듣기에 향기롭다. 사수파가 원하는 모델은 병원 90%가 공공기관이자 의사와 직원 모두 공무원 신분인 영국의 국가보건서비스(NHS)다. 2000년 의료파업 당시 사수파는 모든 ‘의료기관의 국유화’와 ‘의료인력의 공무원화’를 주창했다. 지금 민주당의 무상의료 이론가인 김용익 의원이 선두에 나섰고 의료산업 진보단체의 열렬한 엄호를 받았다. 그런데 사수파 논리에 하나가 빠졌다. 건강보험료 인상! 영국은 공공의료의 증진을 위해 국민들 스스로 소득의 13%에 달하는 거액의 보험료를 지불한다. 한국은 5.89%다. 비용을 지불할 각오가 없으면 공공의료는 천상의 소리다.



 한국의 병원 중 지방의료원처럼 국가가 운영하는 기관은 6%에 불과한데, 막대한 혈세 지원이 없으면 유지 존속이 불가능한 지경에 놓여 있다. 이유는 명백하다. 가장 결정적 요인은 민간 병원과의 무한경쟁. KTX가 개통된 이후 서울의 대형 병원들이 전국의 환자를 빨아들이는 바람에 지방 중대형 병원들이 속속 도산했던 것이 지난 10년간 일어난 ‘소리 없는 학살사’였다. 이런 와중에 시설이 열악한 지방의료원은 어떻게 버텼을까. 더욱이 진주는 병원 과잉 지역이라서 진주의료원의 선호도는 급락했다. 직원 240명에 하루 환자 200명이 내원했다. 너무 한가하고 너무 조용한 병원이었던 것이다.



 적자 재정을 떠안은 도정의 경영 개선 명령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한적한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 직원의 봉급은 민간 병원 수준이었다. 병원장은 노조와의 합의 없이 개혁 드라이브를 걸 수도 없었고 적자를 메워주는 마당에 무리수를 둘 필요도 없었다. 진료비가 민간 병원에 비해 83%고, 돈 되는 비급여시술을 하려면 고가 장비를 들여와야 하는 터에 노조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으랴만, 노조 보호막만은 단단하게 쳤다. 직원 및 가족진료비 감면 조항을 과감하게 늘렸다. 빚잔치와 다를 바 없는 ‘혜택 향연’은 적자 지방의료원의 공통 사항이지만, 정년퇴직자 가족 ‘우선 채용’은 진주의료원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협약 사항이다. 물론 김천·군산의료원처럼 경영진과 노조가 발 벗고 회생에 나선 모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홍반장이 ‘노조 해방구’라 했던 그 원색적 표현은 공공의료의 상처를 건드린 아픈 개념인 것은 틀림없다. 홍반장은 적자 충당금을 아예 ‘빈곤층 무상의료’에 쓰겠다고 선언했다. 차제에 34개 지방의료원을 저소득층 전문병원으로 바꿀 것을 정부에 주문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대안인데, 평등의식으로 무장한 공공의료 사수파의 거센 저항을 불러온 것이다.



 돈 내기는 싫고 공공성 열망은 세계 최고인 한국에서 홍반장이 선택한 이 극약처방을 ‘공공의료 말살’로 비난할 수 있을까? 생명버스가 부려놓을 거칠고 화려한 구호들과 대면할 ‘용감한 준표씨’는 우군 없는 외로운 투쟁에 나설 것이다. 아, 불쌍한 홍반장!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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