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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성범죄, 법뿐 아니라 성문화도 바꿔야

중앙일보 2013.06.18 00:03 종합 30면 지면보기
내일부터 성범죄와 관련된 친고죄가 폐지된다. 피해자 고소가 있어야 수사했던 성범죄를 일반 범죄처럼 제3자의 신고나 수사관의 인지로도 곧바로 수사를 개시하고, 피해자와 합의해도 가해자는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지난해 11월 이런 내용의 형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후 환영 입장도 많았지만 반발 의견도 적지 않았다. 물론 바뀐 법으로 인해 혼란과 남용의 부작용이 나타난다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억울함 없이 판단해야겠지만 친고죄 폐지의 정신을 곡해하거나 폄훼하려 해서는 안 된다.



 친고죄 폐지는 피해갈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과거 우리 사회는 성범죄를 개인의 성적 결정권을 침해하는 범죄로 인식했다. 또 여성의 정조 상실을 큰 타격으로 생각해 오히려 피해자의 프라이버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친고죄를 유지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피해 여성이 정조 문제로 공격당하고, 가해자가 합의를 종용하는 등의 2차 피해가 빈발했다. 또 고소 취하의 가능성 때문에 수사가 소극적이고, 가해자들이 법망에서 자유롭게 빠져나가면서 성범죄에 관대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결국 성범죄가 제어할 수 없이 만연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성범죄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범죄가 아닌 사회공동체를 위협하는 흉악 범죄라는 인식이 높아진 게 사실이다.



 또 성범죄는 권력 남용 범죄의 측면이 있다. 대부분 직장이나 조직 내 성범죄는 우월한 지위의 상사가 저항하기 힘든 하급자를 상대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또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가해자가 남성이 아닌 상급 여성이 되는 경우도 생겼다.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선 여교수가 남자 제자들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성추행해 온 사실이 문제가 되어 해임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개정된 법에선 대상을 ‘부녀자’가 아닌 ‘사람’으로 바꿔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시했다. 이번 친고죄 폐지는 이 같은 사회 풍토와 인식의 변화를 반영해 법이 뒤따라간 경우다.



 이번 개정된 형법의 시행은 그동안 강력한 성범죄 처단을 어렵게 했던 걸림돌 하나를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경남 중소도시의 경찰관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 이상(53.8%)이 성폭력은 여성의 심한 노출 때문에 일어난다고 대답했다. 술 취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경우 여성 책임이라는 응답도 37%였다. 이는 응답한 경찰의 문제라기보다 남성들의 성적 본능 발현 자체를 관대하게 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 성적 상상과 본능을 입에 담고, 충동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는다면 성범죄에 대한 강한 처벌의지는 전과자를 늘리는 것밖에 할 게 없다. 성범죄를 줄이고, 예방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사회의 성문제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과 전향적 성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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