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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명품 가구브랜드 비트라(Vitra)의 ‘디자인 경영’
최근 내한한 비트라 CEO 한스 페터 콘과 파트리크 군츠부르거 부사장을 만나 비트라의 ‘디자인 경영’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이들은 서울 대림미술관의 강연 프로그램 ‘D Talks’에서 ‘진짜 디자인 경영’이라는 주제로 지난달 29일 강연했다. 강연에 앞서 중앙SUNDAY와 한 인터뷰에서 이들은 “우리가 내리는 명품의 정의는 ‘고쳐서 계속 쓸 수 있는 물건’이다. 대를 물려 차는 스위스 시계 같은 명품 가구를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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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을 위해 비트라가 강조해온 건 ‘네트워킹’이다. 비트라는 회사 안에 디자인팀을 별도로 두지 않는다. 대신 프로젝트에 따라 외부 디자이너와 협업을 한다. ‘비트라 에디션’이라 이름 붙인 실험적인 제품이 좋은 예다. 비트라의 역사가 곧 현대 디자인의 역사라는 평가를 듣는 이유다.
“세월이 지나도 형태와 품질 모두 변함없는 ‘불멸의 가구’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해당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를 데려오는 게 관건이었다. 그들을 믿고 100% 재량권을 줬다. 모든 디자이너는 고유한 개성을 지닌다. 비트라는 그런 개성을 한데 모으는 ‘편집자(editor)’의 역할을 한다. 어떤 디자이너가 탁월하다고 해서 꼭 우리 회사 직원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진 않는다.”
이런 시각은 가구를 만드는 데 단계별로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디자이너는 물론 부품업체·유통업체 등 우리 제품이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전문가로서 독립성을 살리는 게 중요하다. 가령 제품마다 가죽·패브릭·폴리아미드·알루미늄 등 재료가 다르다. 재료마다 물성(物性)을 잘 이해하고 다른 재료와 결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 잘 아는 사람이 있다. 적임자를 제대로 골라 쓰는 게 우리 일이다. 흔히 기업들은 고객이 제일 중요하고 직원은 그 다음, 부품업체는 그 다음 이런 식으로 서열을 매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겐 직원·고객·디자이너·부품업체·유통업체 등 모든 관련자들이 똑같이 중요하다.”
팀워크, 협업에 대한 강조는 계속됐다. “디자인은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어떤 혁신을 이루려면 당연히 실수가 따른다. 남의 걸 베낀다면 실수는 적겠지만 형편없는 결과물을 내놓게 되고,결과적으로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된다. 좋은 결과물을 도출하는 데 가장 필요한 건 전문가들의 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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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20년 후 사무실은 ‘도시 지도(city map)’처럼 된다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생활하다 보면 카페·극장·식당·공원 등 다양한 인프라를 이용하게 된다. 사무실에서도 사무 처리, 회의, 휴식, 자료 조사 등 다양한 활동이 이뤄진다. 그렇다면 사무실은 개인별로 나눠진 구획이 아니라 시민(citizen)들에게 개방된 형태로 꾸며져야 맞다. 사무 공간일 뿐 아니라 생활 공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티즌 오피스는 일하는 사람들끼리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한 민주적이고 비관료적인 공간을 만들자는 개념이다. 그래서 비트라 본사 사무실엔 팀장이나 부장의 방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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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안토니오 치테리오가 94년 디자인한 테이블 ‘애드 혹(Ad hoc)’이나 2011년 나온 아이디 체어도 이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특히 아이디 체어는 개인별로 인체공학적 맞춤이 가능한 8000여 개의 옵션을 둔 점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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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은 프랭크 게리가 유럽에서 설계한 최초의 건축물이다. 비트라 제품 80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이 밖에 안도 다다오의 회의장, 헤어조그와 드 뫼롱의 비트라 하우스, 가즈마 세지요와 니시자와 류에로 구성된 일본 건축가 그룹 SANAA의 공장 건물, 재스퍼 모리슨의 버스 정류장, 자하 하디드의 소방서 등이 모여 있다.
이곳이 조성된 계기는 얄궂다. 81년 대형 화재가 일어나 공장 대부분이 탔다. “9·11 테러나 닷컴버블 붕괴, 2008년 금융위기 등 글로벌 경제난보다 그때가 비트라엔 진짜 위기였다.” 공장 재건 프로젝트는 흥미롭게도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경연장으로 꾸며졌다.
“이것도 결국 우리가 수십 년에 걸쳐 추구해온 네트워킹과 민주주의 원리에 기반한 것이다. 최고의 건축가를 정해 그들의 스타일을 최대한 존중한다. 그래야 최고의 건물이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건축이야말로 최고의 투자다. 100년 넘게 가도 남아 있으면서 지역 사회에 영감을 주고 세계의 관심을 끄는 매개체가 된다. 비트라 캠퍼스를 찾는 방문객이 해마다 40만 명이다. 기업 입장에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마케팅이 어디 있겠나.”
이런 긴 호흡의 경영 철학이 결국 60년 가까이 기업의 명성을 유지했다. 50년대부터 일찌감치 ‘디자인 경영’의 싹을 가꾼 선견지명에 대한 두 사람의 설명은 제각기 흥미로웠다.
“제국주의나 독재정권의 지배가 없었고 오랜 세월 중립국의 위치를 유지해온 역사에서 길러진 민주적인 DNA가 기업에서도 발현된 것 같다. 이런 과정이 완료된 게 아니라 계속 진화하고 있다는 게 비트라의 강점이다”(한스 페터 콘).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앞장서서 펼쳤던 오너에게서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좋은 직원들을 채용하고 현명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행운도 따랐다”(파트리크 군츠부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