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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밤 한 톨에 울고 웃는 모습 요즘도 많다

중앙일보 2013.06.14 00:53 종합 31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정부 중앙부처에서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다 얼마 전 퇴임한 K씨. 함께 술잔 기울이며 오랜 공직생활 경험을 들려주었다. 공무원의 보람은 역시 정책 아이디어를 내 현실화하는 맛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책 못지않은 관심사는 역시 인사다. 제아무리 아이디어가 넘쳐도 합당한 직책이 주어지지 않으면 빛 좋은 개살구다. K씨도 된통 쓴맛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흘린 음해성 소문이 귀 얇은 고위층에 먹혀든 탓에 변방 부서로 쫓겨났다. 몇 년 전 화창한 5월이었다.



 “한심하고 어처구니없습디다. 새로 옮긴 부서 창가에서 바깥을 내다보는데, 라일락 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울화가 더 솟구치더라고요.”



 며칠 후 책장에서 무심코 꺼내 펴든 게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산문집이었다. 읽어내려가다 ‘밤 한 톨을 다투는 세상’이란 글이 눈에 들어왔다. 전남 강진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한 대목이었다.



 ‘저녁 무렵에 숲 속을 거닐다가 우연히 어떤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숨이 넘어가듯 울어대며 참새처럼 수없이 팔짝팔짝 뛰고 있어서 마치 여러 개의 송곳으로 뼛속을 찌르는 듯 방망이로 심장을 마구 두들기는 듯 비참하고 절박했다. 어린애는 금방이라도 목숨이 끊어질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나무 아래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다른 사람이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아아! 세상에 이 아이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저 벼슬을 잃고 권세를 잃은 사람들, 재화를 손해 본 사람들과 자손을 잃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달관한 경지에서 본다면, 다 밤 한 톨에 울고 웃는 것과 같은 것이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박석무 편역).



 K씨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내가 지금 이 어린애 꼴이지 않나. 밤 한 톨에 마음이 상하다 못해 썩어가는 꼬락서니 아닌가. 자세를 고쳐 잡고 일하기 시작했다. 2년 뒤 ‘정세’가 바뀌어 요직에 복귀했고, 명예롭게 공직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금융권 공기업·협회장 인사가 주목받고 있다. 그제 후보 등록을 마감한 한국거래소 이사장 자리에는 11명이나 지원했다. 밤 한 톨 정도가 아니라 송이째 몇 개씩 잡숴 본 분들이 대부분이다. 4선 의원을 지낸 인사가 내정됐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청와대 대변인이 나서서 부인하는 해프닝도 빚어졌다. 기본적으로 자리 욕심은 곧 일 욕심이다. 뒷전에서 공연히 구시렁거리는 유형이 예뻐 보이지 않는 이유다. 그렇더라도 인연이 안 되면 밤 한 톨 잃은 초연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 싶다. 원래 인사의 성분은 소수의 환호와 다수의 한숨이기에 하는 소리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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