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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억 장학재단 '기부왕'의 짜장면 퇴임식

중앙일보 2013.06.04 00:30 경제 6면 지면보기
이종환 삼영그룹 명예회장이 3일 퇴임 연설을 하고 있다. 1958년 창업해 매출 3500억원대 중견그룹을 일군이 명예회장은 앞으로 관정교육재단의 운영 자산을 1조원으로 키우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사진 삼영화학]


3일 오전 11시쯤 서울 소공동에 있는 삼영화학 빌딩. 감색 양복에 푸른색 넥타이를 맨 노신사가 잰걸음으로 건물에 들어섰다. 수행비서가 있었지만 그는 서류가방을 오른손에 들고 직접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958년 삼영화학그룹을 창업한 이종환(90) 명예회장이다. 자산이 8000억원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장학재단인 관정(冠廷)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해 일반인에게 ‘기부왕’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종환 삼영화학 회장 은퇴
좁은 응접실서 마이크도 없이 치러
행사 뒤 평소처럼 중식당서 식사
"이렇게 아껴 1조 재단으로 키울 것"



 이날 삼영화학그룹은 이 명예회장이 2선으로 물러나고 그의 장남인 이석준(59) 부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는 행사를 했다. 삼영그룹은 화학과 타일·플랜트·애자(절연체)·호텔·레저 분야에서 18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전자제품의 핵심 소재인 콘덴서용 초박막필름에선 세계 3대 메이커로 꼽힌다. 전체 임직원 1000여 명, 지난해 그룹 매출은 3500억원대에 이른다.



 이 명예회장이 55년간 맨손으로 일궈 낸 중견그룹 총수에서 퇴임하는 자리였지만 이날 행사는 소박하고 단출했다. 이·취임식 행사장은 이 건물 6층 회장실이었다. 이 명예회장이 87년부터 집무실 겸 응접실로 사용하던 곳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40여㎡(약 13평)에 불과한 작은 공간이다. 삼영 관계자는 “전체 16층 건물인데 대강당을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그룹 임원 30여 명과 일어선 채로 행사를 진행했다. 흔한 사가 제창, 연혁 낭독, 비디오 상영 같은 형식적인 절차는 전혀 없었다. 하다못해 마이크도 없었다. 사회자가 행사 시작을 알린 다음 이 명예회장이 3분여 동안 퇴임사를 한 게 고작이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집념이 있어야 뜻을 이룰 수 있다. 회사가 화목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그런 다음 “제가 도전의 선봉에 서겠다”는 신임 이 회장의 각오가 이어졌다. 행사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날 이·취임을 알게 해 준 유일한 표시는 업계와 지인들이 보낸 축하 화분 60여 개였다. 이마저도 회사 관계자는 “자체 행사라 외부 손님을 초대하지 않았다. 신문을 보고 (화분을) 보낸 듯하다”고 말했다.



 행사가 끝난 뒤 임원 30여 명은 같은 건물 16층에 있는 중식당으로 향했다. 이날도 역시 이 명예회장은 ‘짜장면’을 주문했다. 그는 평소에도 짜장면처럼 1만원 이내의 소박한 식사를 고집해 왔다. 그는 기자에게 “(퇴임이) 특별한 날이 아니다. 이렇게 아껴서 재단 재산을 1조원으로 키우는 게 특별한 일”이라고 조용히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앞으로 자신의 사재를 출연해 2000년 설립한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운영에 주력한다. 관정은 그의 호다. 지금까지 재단에 쌓인 운영자산은 8000억원가량. 장학금 수혜자만 5000명이 넘는다. 한국이 잘사는 길은 ‘인재 육성’이라는 소신으로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꿈과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재단의 자산 규모를 2015년까지 1조원으로 늘리는 것이 그의 다음 목표다.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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