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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앨리스 닐

중앙일보 2013.05.30 00:34 종합 32면 지면보기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정면을 응시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 어딘가 애잔하다. 편안한 옷차림과 자세는 익숙한 곳에서 친밀한 이에게 포즈를 취했음을 알려준다. 복숭앗빛 뺨과 눈 밑의 그늘, 블라우스의 잔잔한 무늬와 구김까지 섬세하게 묘사한 이는 그녀의 시어머니다. 스스로 ‘영혼의 수집가’라 일컬었던 인물화가 앨리스 닐(Alice Neel·1900~84)이 그린 ‘낸시’(1966)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전시장의 벽 하나를 혼자서 차지하고 있는 세로 127㎝의 이 큰 그림은 공간을 압도하기보다는 관객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앨리스 닐은 굴곡진 삶을 살다간 미국의 여성 화가다. 쿠바인 남편 사이에서 낳은 큰딸은 전염병으로 잃고, 남편이 둘째 딸을 데리고 쿠바로 돌아가면서 혼자 남았다. 이후 신경쇠약으로 두 차례 자살을 기도했고, 정신병원에 1년간 입원했다. 뱃사람과 3년을 살았는데, 그는 동거녀가 화가인 것이 마뜩잖았던 듯 닐의 그림을 불태워버렸다. 나이트클럽 가수였던 두 번째 동거남 사이에서 맏아들을, 2년 뒤 유부남인 영화감독과 둘째 아들을 낳았다.



앨리스 닐, 낸시, 1966, 캔버스에 유채, 127×101.6㎝ ⓒEstate of Alice Neel
닐은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이 화단을 휩쓸었던 60, 70년대 “추상은 인간을 외면한다. 나는 휴머니즘을 지향한다”며 주류와 거리를 뒀던 이단아이기도 했다. 분방하되 외로웠던 66세의 시어머니는 젊은 큰며느리를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엄마로, 며느리로, 그리고 독립된 개인으로, 부딪치고 깎이며 성장하게 될 또 다른 한 여자의 인생길을 떠올렸을까. 그리고 큰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예쁘지 않게 그려 준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들었을까.



 닐은 초상화를 그리기 전 모델과 여러 번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해서 제3자 눈엔 보이지만 당사자는 알지 못하는 세밀한 부분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그래서 모델들은 매우 불편해했고, 생전에 그녀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닐은 그간 인물화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과의 공감 자체를 소재 삼았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화가였다. 오늘날의 역사란 이 같은 개개인의 이야기가 쌓여 만들어지지 않나.



 닐은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람들로 그 시대를 드러냈다. “모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너무나 허전하고 두려워진다. 마치 폐허에 버려진 느낌이다.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끔은 너무 어려웠다.”



 74세에야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며 재조명되기 시작했으나, 10년 뒤 결장암 진단을 받고 그해 사망했다. 남긴 것은 그림용 앞치마 두 개, 팔레트 두 개, 옷 네댓 벌, 그리고 침대 매트리스 밑에 넣어둔 현금 깡통뿐이었다.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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