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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시시각각] 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

중앙일보 2013.05.30 00:29 종합 34면 지면보기
고정애
논설위원
지난주 들은 얘기 중 가장 기묘했던 건 이거다.



 “최근 청와대 사람, 특히 ‘늘공’(늘 공무원 즉 일반직 공무원)이 계속 청와대에 있었으면 하더라. 일하기 편해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있고 싶다는 거다.”



 일하기 편한 청와대? 그간 경험으론 논리적으로 성립되는 말이 아니었다. 형용모순 말이다. ‘응급환자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대형병원 응급실 전문의’쯤 되는 표현이어서다. 정권 초반 청와대에선 각 부처에서 파견된 엘리트 공무원들이 죽도록 일하곤 했다. 1년 혹은 2년 뒤 영전돼 돌아가지만 정신적·체력적으론 고갈된 채였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치아 10개를 뽑았다는 게 이 시기 1년이었다. 청와대는 막강하고 승진이 보장되며 원 없이 일하는 ‘보람’이 있는 직장이긴 해도 편한 직장은 아니었다.



 그러니 의아할밖에. 지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의 지시가 워낙 구체적이어서 별로 할 일이 없다더라. 과거 정권에선 대통령이 지시하면 청와대 사람들이 모여서 실현방안이 뭘까 머리를 싸매고 회의도 많이 해야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지. 지시를 그대로 부처에 전달하면 되니까. 밑에서 나서서 혹은 알아서 일하길 권하는 분위기도 아니고….”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가 구체적이긴 하다. 1만1000자 분량이어서 지난주 수석비서관회의가 주목받았지만 평소 발언록도 수천 자 안팎이다. 박 대통령은 이 같은 ‘깨알’ 리더십에 대해 “정권 초기에 어떤 국정철학을 가지고 있고 어디에 중심이 있고 한 걸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일리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진드기의 병원성을 따지고 ‘시간제 일자리’의 어감(語感)을 챙기며 “내일도 안 되면 모레도 안 된다”며 실무협상의 시한을 정하는 데까지 간 건 아무래도 지나치다. 관료의 속성상 앞으론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기 전엔 움직이지 않을 개연성이 커서다. 한 원로도 “박 대통령이 빨리 일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시해선 장·차관도, 수석도 아무 일을 못한다”고 걱정했다. 그에게 좀 더 물었다.



 -대통령이 많이 알지 않나.



 “최고 양질의 정보를 듣고 국가 문제를 고민하는 최고의 애국자이긴 하다. 그러나 제대로 일하려면 주변 사람들의 역량 또한 발휘돼야 한다. 대통령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자신이 쓴 사람들 아니냐. 믿어줘야 한다.”



 -관료들이 복지부동(伏地不動)할 거란 걱정도 많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보완책을 내놓을 환경이 아니어서 그리 될 수 있다. 시킨 대로 부지런히 받아 적고 밑에 사람들에게 전달하긴 할 텐데…. 관료들이 이기적이고 기득권을 지키는 데 도사지만 개인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들이다. 지시가 잘된 건지 잘못된 건지 안다. 마음속으로 깊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기야 대통령이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담당 정책 라인만큼 알겠는가. 일머리를 안다는 평을 들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80%는 결국 참모들이 낸 의견을 따랐다”(전 청와대 고위 관계자)고 하지 않나.



 박 대통령은 채 100일 안 됐으니 실감하지 못했을 순 있다. 그러나 벌써 “최근 공무원을 만났는데 현 정부의 모토는 ‘SSKK(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라는 대로)’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더라”(김재일 단국대 교수)고 하니 걱정이다. “딱히 되는 일도 없을 거고 안 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 관료도 봤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 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참모들도 도와야 할 터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의 팁이다.



 “그냥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면 대통령이 기분 나빠할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대통령에게 권위가 붙어 더 그럴 거다. 유능한 참모라면 대통령이 진짜 고민할 큰 생각거리를 대신 줘야 한다. 그래야 자잘한 것이 (관심권에서) 날아간다.” 지금의 참모가 할 수 있을까. 달리 할 일도 없지 않은가.



고정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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