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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저 역설? … 자동차 해외판매 더 늘었다

중앙일보 2013.05.30 00:14 경제 1면 지면보기
일본 어부들 ‘엔저 항의’ 시위 엔화 약세가 예상외의 결과를 낳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수출 피해는 예상보다 크지 않고, 오히려 일본 내에서 부작용이 일고 있다. 29일 도쿄에서 일본 수산업협동조합 회원들이 엔저로 인한 연료비 상승에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도쿄 AP=뉴시스]


엔화 약세 때문에 우리나라 수출 산업이 난리라고 한다.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한국 기업들이 타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엔저인데도 좀체 일본의 수출은 늘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일본의 수출 잠정치는 591억 달러. 지난해 4월에 비해 13.5% 줄었다. 반면 한국은 4월에 463억 달러를 수출해 소폭(0.4%)이나마 1년 전보다 늘었다.

[이슈추적] 엔저 오해와 진실



일본, 엔저에도 수출 계속 줄어



 일각에서는 “환율의 영향이 수출에 반영되는 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이상하다. 엔저 발동이 걸린 건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거의 1년이 돼 가는데도 한국과 일본의 수출 성적표에는 엔저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업종별 한국 대표 기업에 물어봤다. 질문은 “엔저 영향이 얼마나 되느냐”였다. 돌아온 답은 “별로”였다. 물론 업종별로 체감 온도는 달랐다. 건설은 위기감이 높았다. 자동차는 엔저 영향을 받긴 했지만, 수출보다 내수가 문제였다. 정보기술(IT)과 조선산업은 “아무 영향 없다”고들 했다.



건설은 직격탄 … 중동에 일본 바람



 건설은 엔저 위협이 현실화됐다. 올해 중동지역 최대 발주공사였던 220억 달러 규모 터키 원전 사업이 일본 컨소시엄에 넘어갔다. 카타르의 프로젝트도 한국을 제치고 일본 수주가 유력한 상태다.



 일본은 플랜트를 지을 때 자국 기자재를 50% 이상 쓴다. 그래서 엔저로 인해 수주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게 됐다. 핵심 기자재를 유럽산 등에 의존하는 한국과 상황이 다르다. 김윤 대림산업 대표는 “일본은 이미 종전보다 5% 이상 가격을 낮출 여력이 생겼다”며 “이를 무기로 한국의 텃밭이었던 중동시장을 잠식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는 외부에서 엔저 걱정이 쏟아지는 분야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대자동차의 1분기 해외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7.9% 증가했고, 일본 도요타는 오히려 2.2% 감소했다. 아직 해외 시장엔 엔저 영향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한국·일본 모두 해외 판매 주력 차종을 현지에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면 엔저가 파고들 틈이 없다. 1분기에 미국 시장에서 도요타 판매가 8% 늘고 현대차는 0.5% 증가에 그쳤다지만, 그건 이유가 따로 있다. 우선은 지난해 현대차 연비가 과장 표시된 게 적발된 영향이다. 또 도요타는 신차를 발표했고 현대차는 신차가 없었다.



차, 해외보다 내수시장에 더 악재



 오히려 엔저로 인해 국내 시장이 위협을 받고 있다. 지난달 도요타의 국내 판매는 3월에 비해 16% 늘었다. 가격을 내려 공격적 마케팅을 펼친 결과다. 그 기간 현대차는 노사갈등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현대차 측은 “다음 달부터 현대차와 수입차를 비교체험하는 ‘비교시승센터’를 운영해 현대차 품질을 알리고 각종 고객 서비스 마케팅을 강화해 내수 시장을 방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IT는 전반적으로 무사태평이다. 스마트폰과 반도체 기술 격차가 워낙 커 일본이 따라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서다. 그러나 일본 소니가 ‘TV의 부활’을 외치며 공격적으로 나서는 것은 주목거리다. 소니는 최근 해상도를 크게 높인 UHD TV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가격을 대폭 낮춘 보급형 UHD TV를 2종 출시했다. 55인치와 65인치의 가격이 4999달러(약 565만원)와 6999달러(약 790만원)에 불과하다. 삼성전자가 85인치 UHD TV를 4000만원에, LG전자는 2500만원에 팔고 있는 상황에서 보급형 제품을 저가에 출시하며 시장 잠식을 노리고 있다.



선박업은 무풍 “진짜 위협은 중국”



 선박 제조 기업들은 엔저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일본 조선산업은 1990년대부터 몰락해 석탄 운반선 같은 벌크선을 만드는 저부가가치 분야만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다.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제조 업체가 약간 남아있지만 일본 내수 물량 대기에 바쁘다. 일본에서는 동일본 대지진 뒤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많이 멈췄기 때문에 발전 연료용 LNG 수요가 늘어 LNG 선박 발주가 증가했다. 국내에는 일본 조선업체처럼 벌크선을 만드는 중소 조선업체도 있다. 그러나 이들조차 엔저에 대해서는 ‘글쎄올시다’다. 삼성증권 한영수 연구원은 “일본이 아무리 가격을 내린들 중국보다 싸게 만들 수 있겠는가. 진짜 위협은 엔저가 아니라 중국”이라고 말했다.



일본 수출 중소기업은 허덕거려



조선산업이 엔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수치로도 증명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업체들의 총 선박 수주량은 160만 CGT(컨테이너선 환산 t수, 해양플랜트 포함)로 올 1월의 70만 CGT에 비해 두 배 이상이 됐다.



 철강은 역설적이다. “달러당 80엔대 후반이던 올 초보다 100엔대 초반인 지금이 오히려 좋다”는 것이다. 설명은 이렇다. 일본 철강회사가 올 초 1달러, 즉 88엔에 철광석을 수입했다고 치자. 가공하는 비용과 마진을 합쳐 100엔이 됐다. 이걸 수출하려고 보니 어느새 환율이 ‘1달러=100엔’에 이르렀다. 그래서 1달러에 수출을 했다. 1달러에 철광석을 수입해 철강 제품을 만들어서는 도로 1달러에 수출하는 것이다. 엔화 약세가 계속 진행되는 게 만들어낸 요술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더 이상 엔 약세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게 불가능하다. 원재료를 1달러, 즉 100엔에 수입을 한 뒤 제품을 만들어 110엔이 되면, 1달러10센트에 수출해야 한다. “엔화 약세가 진행될 때의 ‘1달러=80엔대 후반’보다 ‘1달러=100엔 초반’인 지금이 낫다”는 역설이 그래서 성립한다.



 포스코 측은 “엔화로 결제를 받는 일본 수출 물량 때문에 매출과 영업이익에 차질이 생기기는 한다”면서도 “그러나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 정도여서 별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일본에 수출을 하는 중소기업은 허덕이고 있다. 엔화로 수출 단가 계약을 한 게 문제다. 게다가 똑같이 1억 엔어치를 수출해도 지난해 초엔 150억원이었는데 이젠 110억원으로 줄어 기업 실적이 나빠진 것처럼 보이게 됐다.



 일부 피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한국 산업은 엔저에 별 탈 없이 견디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엔저 타령’이 번지는 데 대해 익명을 원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를 감안해도 실적이 좋지 않은 기업 중 일부가 엔저를 구실 삼는 것 같다. 일본을 경계하는 국민 감정에 호소해 엔저를 들먹이며 실적 부진을 감추려는 것이야말로 경계해야 한다.”



증권팀=권혁주·윤창희·홍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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