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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장치 없이도 보석처럼 빛난 소프라노의 마력

중앙선데이 2013.05.24 23:58 324호 24면 지면보기
200회 생일에 듣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은 각별했다. 이날의 청중은 2013년 5월 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경험한 ‘바그너 스페셜 콘서트’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핵심은 아마도 콘서트 2부 ‘발퀴레’(4부작 ‘니벨룽의 반지’ 중 두 번째 작품) 1막에서 여주인공 지클린데 역을 노래한 미국 소프라노 캐서린 네이글스태드가 될 것 같다.

KBS교향악단 바그너 생일 특별공연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이한 한국바그너협회와 KBS교향악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연주회 1부는 오페라 ‘리엔치’ 서곡으로 시작됐다. 출발은 약간 불안했다. 단호하고 일사불란한 연주가 요구되는 부분에서 악기들이 다소 주저하는 듯한 기색도 보였다.

그러나 지휘자 카이 뢰리히는 강약과 완급을 탁월하게 조절하며 밝고 경쾌한 벨칸토의 흔적과 바그너 특유의 장대함이 교차하는 이 서곡의 특성을 유연하게 살려냈다. ‘탄호이저’ 서곡 역시 도입부에서 금관악기들이 매끄럽지 않은 어울림을 보여 아쉬웠지만, 오케스트라는 이내 감각적인 활력으로 폭발하는 에너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이번 공연의 객원악장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를 리드한 바그너 베테랑 바이올리니스트 김민 교수의 활약이 돋보였다. ‘지크프리트 장송행진곡’은 앞서 연주한 두 서곡의 화려함과 찬란함을 뒤로 한 채 깊고 육중한 저음현과 타악, 그리고 장엄한 관악으로 콘서트의 분위기를 전환했다. 바그너 음악세계의 심장부인 ‘반지’ 중 ‘발퀴레’의 비극으로 넘어갈 다리를 놓은 셈이다.

휴식시간 뒤 시작된 ‘발퀴레’ 1막. 무대장치와 의상 없이 가수들이 콘서트 드레스 차림으로 보면대를 앞에 놓고 노래하는 ‘오페라 콘체르탄테’ 형식이었다. 최고의 신 보탄이 인간 여인과 결합해 낳은 쌍둥이 남매 지크문트와 지클린데의 사랑 이야기다. 먼저 무대에 등장한 지크문트 역의 테너 마르코 옌취가 입을 열자 청중은 그의 미성과 섬세한 표현력에 빠져들었다. 흔히 ‘영웅테너’로 불리는 바그너 ‘헬덴테너’의 조건은 금관과 타악이 가세한 바그너의 두터운 오케스트라 총주를 뚫고 나오는 큰 음량, 그리고 네 시간 넘는 연주시간을 버텨내는 지구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감성과 인간미를 표현할 수 있는 미성은 필수적이다. 특히 요즘은 미성의 바그너 테너들이 세계적인 대세다.

지클린데 역의 소프라노 캐서린 네이글스태드가 등장해 노래를 시작하자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청중은 단번에 무대에 몰입된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네이글스태드의 완벽한 발성과 감탄할 만한 연기력은 무대장치가 없는 콘체르탄테에서도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공연 전 인터뷰에서 테너 마르코 옌취가 “무대에서 처음 부르는 배역의 경우 음악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콘체르탄테 공연을 선호한다”고 말한 반면 네이글스태드는 “역시 제대로 갖춰진 오페라 무대에서 가창도 연기도 훨씬 자연스러워져 좋다”고 말했다.

“지클린데는 ‘발퀴레’ 1막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억눌린 채 눈치를 보며 말을 안으로 삼키는 여자였다가 지크문트를 만나 진정한 해방에 도달하죠.” 자신의 그러한 인물 해석을 네이글스태드는 무대 위에서 부족함 없이 펼쳐 보였다. 지크문트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연기를 통해, ‘승리’라고 그의 이름을 지어 불러주는 장면에서, 지크문트를 격려해 마침내 신검 ‘노퉁’을 뽑아들게 만든 뒤의 벅찬 피날레에서, 매순간 네이글스태드는 청중을 매혹하고 사로잡았다.

악역 훈딩 역을 노래한 젊은 베이스 하성헌은 청중 모두에게 ‘발견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치밀한 발성, 깊은 울림이 있는 음색, 풍요로운 저음, 밀도 있는 인물 분석을 통한 표정 연기, 무대를 압도하는 체구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조건과 역량은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충분히 예감하게 했다.

“흔히 바그너는 똑같은 멜로디를 수없이 되풀이할 뿐이라고 말하죠. 그러나 같은 멜로디가 나와도 매번 리듬과 화성과 악기를 바꿔가며 전혀 다른 효과를 내는 것이 바그너 음악의 매력입니다.”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지휘자 카이 뢰리히는 매번 그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내며 지휘봉 없는 맨손으로 박력 있게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미학자 전예완씨의 탁월한 자막 번역은 바그너를 두려워하던 청중에게 바그너의 진정한 즐거움을 깨우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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