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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만의 무대 … 그녀는 암을 이겼고 그는 시력을 잃어간다

중앙일보 2013.05.24 00:57 종합 21면 지면보기
21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스몰린 성당에서 피아니스트 이경미씨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와 협연하고 있다. [사진 지토패밀리]


19일(현지시간) 오후 2시.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근처 아파트. 피아니스트 이경미(51)씨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상임지휘자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78)가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이씨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 이경미
드미트리예프 지휘로 모차르트 협주곡 연주



 한 시간 반 이어진 연습은 3악장에서 멈췄다. 드미트리예프는 “이건 로맨스가 있어야 해요. 남녀가 함께 춤을 추는 그런 감정이 있어야 해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가볍게 몸을 흔들며 왈츠를 췄다. 이씨의 연주에 맞춰 한참 춤을 춘 드미트리예프가 이마에 흘린 땀을 닦았다. 연습은 오후 5시 넘어 끝났다.



피아니스트 이경미(왼쪽)와 지휘자 드미트리예프.
 둘은 91년 처음 만났다. KBS 교향악단 음악감독을 지내기도 한 지휘자 드미트리 기타옌코(73)의 소개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협연을 하게 됐다. 당시 러시아는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한창이었다. 공항에는 기관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고, 빵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화폐개혁의 후폭풍이었다.



 이씨는 “‘과연 음악회가 열릴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는데 (드미트리예프가) 관객들이 잘 차려 입고 올 거라고 안심시켜줬다”고 기억했다. 실제로 2000여 객석이 이씨의 모차르트 연주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꽉 찼다고 한다.



 이씨는 94년 백야축제 때 다시 초청됐다. 2000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와 함께 일본 10개 도시를 돌았다. 그러다 2009년 유방암이 발견됐다. “음악 말고는 해본 게 하나도 없는데. 너무 억울했어요. 앞으로 피아노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죠. 항암 치료 2년 동안 건반 한 번 만져본 적이 없어요.”



 그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게 된 건 드미트리예프의 전화 한 통 덕분이었다. “네가 피아니스트건 아니건 우리 부부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에 왈칵 눈물을 흘렸다.



 21일 오후 7시. 이씨는 스몰린 성당에 마련된 특별 무대에 드미트리예프와 함께 섰다. 22년 전 그날처럼 관객들이 가득했다. 레퍼토리는 모차르트가 8살 때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9번. 4년 전 약속한 공연이었지만 암치료로 늦어졌다. 이씨는 1·2악장에선 차분하고 신중하게 건반을 눌렀다. 3악장에선 한결 가벼워진 손으로 리듬을 탔다.



 드미트리예프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몸 전체를 흔들어가며 지휘했다. 이씨는 이번 무대가 그와 함께하는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드미트리예프는 망막 이상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씨가 말했다. “선생님은 아무리 짧은 음악이라도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길 만한 스토리를 만들어요. 그게 드미트리예프의 음악이죠.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나누는 게 행복이라는 걸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 열정을 봤기에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상트 페테르부르크=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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