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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 부귀, 물고기 = 다산, 쏘가리 = 출세

중앙일보 2013.05.14 00:46 종합 21면 지면보기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주로 즐기던 ‘문인화(文人畵)’가 클래식 음악이라면, ‘민화(民畵)’는 저잣거리 상인들도 흥얼거리는 유행가였다.


호림박물관 ‘민화여행전’

 19세기 들어 신분제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중인이나 서민들의 그림에 대한 욕구가 분출했고, 이런 욕망을 채워준 것이 민화였다. 민화를 그린 이들 중에는 기량 출중한 전문 화원도 있었지만, 동네에서 그림깨나 그린다는 아마추어 화가나 떠돌이 화가도 많았다. 이들의 손을 통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미감을 가진 작품이 탄생했다.



조선시대 민초들의 소망 담아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화조도(花鳥圖) 8폭 병풍의 세 장면. 꽃과 새, 물고기 등 민화의 주요 소재들이 고루 등장한다. 가장 왼쪽 그림의 물고기 세 마리는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 즉 밤과 겨울, 비 오는 날을 상징하는 삼여도(三餘圖)다. [사진 호림박물관]


 서울 호림박물관(관장 오윤선) 강남구 신사동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상상의 나라-민화여행전’은 민화의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는 전시다. 도자기·공예품 위주의 전시를 해 온 호림박물관이 30여 년 수집해온 민화를 처음 공개했다. 화훼(花卉·꽃과 풀)와 영모(翎毛·새나 짐승), 책거리와 문자도, 산수화와 인물 등 세 분야로 나눠 80여 점을 선보인다.



 민화는 주로 병풍으로 만들어져 방을 장식했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방에 놓인 것은 화조도(花鳥圖)나 어해도(魚蟹圖)였다. 그림 속 꽃과 동물에는 삶의 다양한 바람이 담겼다. 쌍으로 노니는 새들은 부부간의 금슬을, 떼로 헤엄치는 물고기는 다산을, 붉게 핀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했다. 남편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을 강을 거슬러 오르는 메기나 쏘가리로 표현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공부가 중요했다. 책과 문방구를 그린 ‘책가도(冊架圖)’는 책을 사랑했던 왕 정조(1752~1800)가 궁궐에서 그리기 시작해 민간으로 퍼져나갔다. 유교의 중요덕목인 ‘孝悌忠信禮義廉恥(효제충신예의염치)’나 ‘壽(수)’와 ‘福(복)’ 같은 길상(吉祥)문자를 기발한 그림으로 표현한 문자도(文字圖)는 설 잔치상이나 아이들의 방에 놓였다. 금강산이나 관동팔경 상상도, 삼국지연의도, 구운몽도 등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을 묘사한 그림도 인기를 끌었다.



 민화는 다소 투박하고 유치하다. 나무보다 덩치가 큰 새, 어딘지 덜 떨어져 보이는 호랑이 등 비례도 맞지 않고 솜씨도 서툰 것이 많다. 하지만 특별한 제약이 없었던 만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개성이나 상상력이 자유롭게 드러난다. 쫙 벌어진 사자의 입에서는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우고, 잉어가 하늘을 날거나 전복이 벼랑을 기어오르기도 한다. 달에서 방아질을 하는 토끼는 왠지 쓸쓸해 보인다.



투박해도 발랄한 상상력 가득



 호림박물관 박준영 학예사는 “그림 하나하나에서 옛 사람들의 소망과 꿈을 읽을 수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웃음이 터지는 장면도 많다”고 설명했다. 민화풍 장식이 그려진 도자기와 자수, 나전칠기 등도 전시에 나온다. 9월 14일까지. 3000~8000원. 02-541-3523.



이영희 기자



◆ J Choice(★ 5개 만점, ☆는 ★의 반 개)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조선 민화의 소박함과 해학, 팝적인 아름다움을 만끽. 특히 청화백자나 공예품 등을 곁들인 것은 호림박물관만의 강점



★★★★(이영희 기자): 꼼꼼히 살펴보면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조상님들의 삶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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