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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영국 대사 단명의 이유

중앙일보 2013.05.14 00:12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상언
런던 특파원
주영 대사는 꽤 폼 나는 자리다. 통상 미·중·일·러 다음으로 비중 있는 대사로 꼽힌다. 한국의 명재상 두 명(강영훈·이홍구)이 거쳤던 직책이기도 하다. 위세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영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 이사국과 G7(주요 7개국)에 속해 있고, 54개 영연방 국가의 맏형이다.



 주영 대사가 곧 바뀐다. 박근혜 정부는 임성남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새 대사로 내정하고 영국 정부에 아그레망(주재국의 임명 동의)을 요청했다. 박석환 현 대사가 부임한 지 8개월 만이다. 특별한 잘못이 없는 대사를 1년도 안 돼 바꾸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외견상 배경은 이렇다. 새 정부는 북핵 문제 협상 대표인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조태용 호주 대사로 교체키로 했다. 대북 정책의 새 기조인 이른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실무 사령탑으로 조 대사가 낙점됐다. 그렇다 보니 차관급인 임 본부장에게 내 줄 자리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주영 대사였을까. 속내엔 MB정부와 박근혜정부의 미묘한 갈등이 깔려 있다. 박 대사와 독일의 김재신 대사는 지난해 대선 넉 달 전에 대사로 지명됐다. 두 대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학(고려대) 후배다. 박 대사는 외교부 의전장으로, 김 대사는 청와대 외교비서관으로 이 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셨다. 각각 외교부 차관과 차관보로 영전한 뒤 나란히 정권 말에 유럽의 핵심 대사가 됐다. 두 대사의 역량과 적임성 여부를 떠나서 ‘측근 챙겨주기 인사’라는 말이 외교부 안팎에서 공공연히 돌았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새 정부의 외교부 수뇌부는 박·김 두 대사를 모두 교체하려 했다. “지난 정권의 잘못된 인사를 바로잡겠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칫 ‘MB 말뚝 뽑기’라는 소리가 나올지 모른다는 걱정에 한쪽만 들어내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주영 대사 교체를 추진한 측에서는 “애초에 잘못 꿰어진 단추를 푼 것뿐”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도 옷을 제대로 여미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우선 신임장 잉크가 마르기가 무섭게 영국에 아그레망을 새로 요청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영국 외교부에선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단추를 너무 서둘러 풀기도 했다. 요즘 한·영 양국은 올해 안에 이뤄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청에 따른 박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 때문에 분주히 접촉 중이다.



 지난 정권의 인사를 타박하고 있는 외교부 수뇌부는 자신들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우연인지, 필연인지 외교부의 장관과 제1차관, 주미 대사 내정자,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내정자는 같은 고교(경기고), 같은 대학(서울대)을 나왔다. 외교·안보 핵심 중의 핵심 네 자리가 ‘동류항’으로 묶인 셈이다. 벌써부터 이역만리 이곳에까지 “(인사 편중이)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고 하소연하는 외교관이 있다.



이상언 런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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