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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늘 아래… 100만원 모으는 게 꿈인 동네

중앙일보 2013.05.13 00:41 종합 12면 지면보기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의 쪽방촌. 서울역 건너편에 있는 외딴 섬 같은 곳입니다. 이 기사는 이곳에 사는 김희천(57·가명)·이광현(56·가명)씨의 사연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스토리텔링 리포트입니다. 쪽방촌 사람들은 극빈층입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도 꿈을 갖고 있습니다. 보증금 100만원을 모아 임대주택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그들의 절망과 희망을 들여다봤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도시의 섬’이라고 불렀다. 행정구역은 서울시였지만 도심 속 고립된 섬처럼 보였다. 그곳의 이름은 동자동 쪽방촌. 서울역 건너편에 언덕처럼 솟아 있는 용산구의 동쪽(東子) 마을. 손바닥만 한 쪽방들이 기차처럼 긴 행렬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가난과 절망에 고통받으면서도 질긴 삶을 견디고 있었다.



 ◆가난이 피부처럼 달라붙은 834명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 주민 김희천씨가 비좁은 골목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에서 주최한 민들레 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을 받아 상금 50만원을 탄 김씨는 “보증금 100만원을 모아 신월동 임대주택으로 이사하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희천씨가 눈을 뜬 건 정오쯤이었다. 밖에선 5월의 신록이 한창 물 올라 있는데, 창문이 없는 쪽방에선 밤낮조차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습관처럼 손을 더듬어 약통을 집어들었다. 14개나 되는 약통 가운데서 고혈압·간경화 약을 골라 삼켰다. 3.31㎡(1평)쯤 될까. 겨우 제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비좁은 쪽방에서 쉰일곱 살 사내는 홀로 병마와 싸우는 중이다.



 희천씨의 쪽방은 2층에 있다. 부엌도 화장실도 없는 2층 건물에 쪽방 7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편의시설이라곤 축 늘어진 고무호스가 전부다. 희천씨는 고무호스에서 수돗물을 받아 밥을 지었고, 수채 구멍에 오줌을 눴다. 큰일은 인근 공동 화장실에서, 샤워는 쪽방촌 상담소에서 해결했다. 쪽방촌에선 수치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그도 한때는 ‘사장님’으로 불렸다. 1990년대 후반 수원에서 돼지갈비집을 운영했다. 그러나 식당에 불이 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화재로 아내와 열 살짜리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재산마저 탕진해 서울역 앞에서 수년간 구걸과 노숙을 해야 했다.



 희천씨는 모진 삶을 견디지 못하고 운명에 투항하기로 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금정역에서 달려오는 전동차에 몸을 던졌다. 2007년 9월의 일이었다.



 “여보, 아들아…. 이 지독한 가난을 견딜 수가 없어. 나도 하늘로 따라갈게.”



 그러나 전동차는 선로에 떨어진 희천씨 앞에 가까스로 멈춰 섰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뒤 그는 지금의 쪽방촌으로 들어왔다. 주변의 도움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됐고, 매달 40여만원씩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다.



 동자동 쪽방촌은 여러 갈래의 골목과 계단들이 미로처럼 이어져 마을을 이룬다. 30층 넘는 초고층 빌딩들이 주변에 늘어서면서 이 마을은 좀 더 외로워졌다. 쪽방촌의 주름 잡힌 골목에는 희천씨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동자동에만 888개의 쪽방에서 834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 가운데 42%(348명)가량이 희천씨처럼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였다. 한 달치 방세 20만~25만원을 내고 나면 하루 생활비가 6000원도 채 되지 않는 극빈의 삶이다.



 동자동 쪽방촌은 원래는 집창촌이었다가 90년대 말 주거지역으로 바뀌었다. 그 옛날 서울역 남성들이 욕망을 배설하던 곳이 도시 극빈층의 마을로 변한 것이다. 쪽방촌 사람들에게 가난은 몸의 피부처럼 달라붙은 숙명이었다. 이들에게 가난은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여겨졌다. 2012년 가을이었나. 희천씨는 건강세상네트워크의 설문조사에 응한 적이 있다. 11월에 결과가 나왔을 때의 충격을 그는 잊을 수가 없다. 조사 대상은 22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136명(61.5%)이 “최근 1년간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답한 것이다.



 ‘10명 중 6명이 자살을 꿈꾸는 마을이라니…. 동자동 쪽방촌에도 희망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희천씨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빈곤의 섬에도 꽃은 피는 걸까



몇 해 전 동자동 쪽방촌에서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진 적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쪽방촌에서 갓난 아이가 태어난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쪽방 마을에 희망의 씨앗이 뿌려진 거라 생각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올 때마다 골목에는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아이 아빠는 희천씨와 형제처럼 지내던 이광현씨였다. 희천씨보다 한 살 아래인 그는 기아자동차 생산직 노동자 출신이다. 광현씨는 90년대 말 공장에서 왼손가락 3개가 잘려나갔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술로 삶을 탕진했다. 술에 빠져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실을 2년이나 지나서야 알게 됐던 날, 그는 자살을 떠올렸다.



2000년대 중반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들어온 곳이 동자동 쪽방촌이었다. 광현씨는 이곳에서 열살 아래 부인을 만나 새삶을 일궜다. 2011년 쉰세 살의 나이에 늦둥이 딸까지 태어나자 그는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광현씨는 세 살 딸에게만큼은 빈곤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단번에 술부터 끊었다. 공공근로나 배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돈을 모았다. 많아야 한 달에 2만~3만원을 저축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1~2년쯤 더 고생하면 100만원쯤이야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을 거라고, 광현씨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100만원이 이렇게 큰돈인가? 부자에겐 하룻밤 술값도 안 될 텐데…. 100만원만 모이면 당장 쪽방촌을 떠날 거유.”



 광현씨는 희천씨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100만원은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제공하는 임대주택의 보증금이다. 쪽방촌 주민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돈이지만 아무도 쉽게 모으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분투하는 광현씨를 보면서 희천씨는 괜히 뭉클해졌다.



 몇 해 전 희천씨는 쪽방촌 인근 쓰레기장 텐트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된 40대 사내를 본 일이 있다. 바람이 사납게 불던 겨울 밤이었다.



 ‘저 비참한 모습이 내 것일 수도 있겠구나’. 치밀어오르는 슬픔으로 떨렸던 밤 희천씨는 ‘쓰레기장 옆 작은 텐트 위의 젊은이’란 제목의 시를 적었다. 그는 이 시를 2012년 서울시 민들레문학상에 출품해 우수상을 받았다. 상금은 50만원이었다. 그는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보관했다.



 ‘50만원만 더 모으면 나도 임대주택으로 갈 수 있겠지’.



 이런 꿈을 꾸면서도 희천씨는 어쩐지 쓸쓸해지곤 했다. 쪽방촌에선 희망조차 외로운 처지였다.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쪽방촌 사람들은 ‘100만원의 꿈’을 꾸지만 그 꿈은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에서 아른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몇 달 전 쪽방촌에 예기치 않은 경사가 생겼다. 쪽방촌 언덕배기에 사는 스물일곱 동갑내기 부부가 아기를 가진 것이다. 부부는 태명을 ‘희망이’라고 지었다. 쪽방촌 사람들은 이 부부를 “희망이 엄마, 아빠”라고 불렀다. 마치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곳 사람들의 주문(呪文)처럼 들렸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어름에서 쪽방촌의 삶은 간신히 흘러가고 있었다.



정강현·손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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