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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권 어디로 … 책 없는 지하철 도서관

중앙일보 2013.05.07 00:29 종합 14면 지면보기
서울 지하철 역사 안에 마련된 ‘해피북 스테이션’이 관리 소홀과 이용 저조로 방치되고 있다. 지난 3일 지하철 2호선 시청역사 안의 책꽂이가 텅 빈 ‘해피북 스테이션’ 앞을 한 시민이 지나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박원순 서울시장이 개찰구로 들어섰다. 손에는 책 한 권을 든 채였다. 다독가로 알려진 박 시장은 이날 열차 안에서 시민들과 책을 읽었다. 서울시가 후원하는 ‘책 읽는 지하철’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지하철 독서문화를 정착시키자는 취지로 지난 1월 시작됐다.

서울 ‘책 읽는 지하철’ 넉 달
역 15곳 중 10곳 책장 텅 비어
박원순 시장 캠페인도 무색
관리 안 돼 전시행정 될 우려



 6일 낮 서울 시청역. 2호선에서 내려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자 조그마한 공간이 눈에 띄었다. 책장과 함께 ‘해피 북스테이션’이란 글자가 보였다. 서울메트로가 운영하는 지하철 미니도서관이다. 하지만 책장은 텅 비어 있었다.



 지난달 26일 찾아간 지하철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에도 도시철도공사가 운영하는 도서공간 ‘행복지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벽걸이 TV만 보고 있었다. 구석의 책장에는 읽다 버린 광고지 몇 장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지하철역 ‘미니도서관’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서울시는 ‘책 읽는 서울’을 표방하며 도서관 예산을 확충하고 각종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지하철역에도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왔다. 하지만 본지 취재 결과 이들 공간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었다.



지난달 26일 지하철 4호선 혜화역 해피 북스테이션. 10년 전 발행한 똑같은 책들만 책장에 가득하다. [강나현 기자]
 현재 서울시 지하철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도서공간은 총 15곳. 역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거나 교회나 업체에서 도서를 기증받기도 한다. 지하철 1~4호선을 담당하는 서울메트로는 ‘해피 북스테이션’을 비롯해 총 12곳에 책 읽는 공간을 마련했다. 5~8호선을 운영하는 도시철도공사도 지난해 10월 휴게공간 ‘행복지대’에 도서공간을 만들어놨다. 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역사당 300~400권 정도씩 총 5000여 권을 구비했다.



 그러나 지난달 말부터 6일까지 지하철역 도서공간들을 기자가 둘러본 결과 현재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15곳 가운데 10곳은 아예 책장이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책이 있는 곳도 읽을 만한 도서를 찾기 어려웠다. 20년도 넘은 백과사전이나 폐품 수준의 너덜너덜한 책이 대부분이었다. 똑같은 책 수십 권이 책장을 채우고 있는 곳도 있었다. 대학생 박지현(25)씨는 “읽을 책이 하나도 없어 스마트폰만 만지다가 일어섰다”며 “이럴 거면 없애는 게 낫지 않나”라고 말했다.



 도서공간 운영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도난이다. 공간이 자율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책을 무단으로 집어가는 사람이 많다. 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처음에 역마다 400권 정도 갖다놨는데 금방 없어졌다”며 “매번 책을 채워야 하는데 예산상 쉽지 않다”고 말했다. 왕십리역 관계자도 “수시로 점검해도 소용이 없고 관리할 인원도 부족해 난감한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시민의식 핑계만 댈 게 아니라 체계적인 관리가 우선이라고 지적한다. 성균관대 이은철(문헌정보학) 교수는 “지하철역 도서관은 의도는 좋지만 자칫 전시행정에 그칠 수 있다”며 “책을 읽은 후 내리는 역에서 손쉽게 반납할 수 있게 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찬수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은 “열린 공간인 탓에 일정 수준의 분실은 감수해야 한다”며 “비용이 들더라도 질 좋은 책을 꾸준히 공급해 시민들로부터 취지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글=강나현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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