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윤호의 시시각각] 아베에겐 헌법이 고무찰흙인가

중앙일보 2013.05.07 00:14 종합 34면 지면보기
남윤호
논설위원
맥아더가 강요한 헌법, 그래서 군대도 못 가진 나라. 정상이 아니므로 빨리 뜯어고쳐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일본 우익의 개헌론에 깔린 인식이다. 평범한 일본인 가운데도 그리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맞는 말인가. 맥아더는 정말 일본에 평화헌법을 강요했나. 연합국총사령부(GHQ)는 군화발로 찍어 눌러 강제 시행했나. 결론부터 말해, 이거 다 뻥이다. 우익이 만들어 퍼뜨린 ‘헌법 신화’다.



 우선 전범국 일본은 항복한 이상 군국주의 메이지(明治)헌법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군국주의 배제, 민주주의 도입을 규정한 포츠담 선언에 따라 새 헌법을 만들어야 했다. 당초 맥아더는 이를 일본 정부에 맡겼다. 이에 따라 1945년 10월 마쓰모토 조지(松本烝治) 국무상이 주도해 헌법 초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쓰모토는 천황주권제 등 메이지헌법의 골격을 그대로 지키려 했다. GHQ와는 아무 상의 없이 말이다. 이게 마이니치신문의 특종 보도로 폭로됐다. 이를 본 맥아더가 안 되겠다 싶어 GHQ에 헌법 초안 작성을 지시했다.



 이때 GHQ에 신헌법 초안을 만들어 준 게 진보 지식인들의 연구모임인 헌법연구회였다. 주도자는 재야 법학자 스즈키 야스조(鈴木安<8535>)와 다카노 이와사부로(高野岩三<90CE>)였다. GHQ는 그들 덕분에 단 9일 만에 평화헌법을 맥아더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그들의 초안이 현행 평화헌법의 골격이 된 것이다.



 그들의 활약상은 2007년 오사와 유타카(大澤豊) 감독의 ‘일본의 푸른 하늘’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평화와 인권을 추구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손에서 평화헌법이 태동하는 과정을 생생히 그렸다.



 평화헌법이 GHQ에 의해 강제 시행됐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GHQ가 계엄군처럼 총검을 휘두르며 억지로 통과시킨 게 결코 아니다. 제국의회 귀족원과 중의원의 심의와 표결을 다 거쳤다. 그 과정에서 여러 수정이 이뤄졌다. 원래 단원제로 하려던 국회가 지금의 양원제로 바뀌기도 했다. 또 의원들이 군대 보유 금지에 반대하자 헌법개정소위의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위원장이 무마하기도 했다.



 3개월에 걸친 논의 끝에 1946년 10월 7일 평화헌법은 중의원을 통과한다. 그날 본회의에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는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중의원과 귀족원의 열성적이고 신중한 심의를 거치고, 적절한 수정을 더해 새 일본 건설의 초석이 될 헌법개정안이 확정돼….” 그가 1분 남짓 발언하는 동안 세 차례나 박수가 터져 나왔다. GHQ가 강제한 헌법이라면 그랬겠나. 이건 비사도 야사도 아니다. 일본 중의원,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 다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일본 우익은 집단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렸나. 왜 강요된 헌법이라고 우기는가. 이 주장은 요즘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인한 9조를 폐기하려고 먼저 개헌 규정인 96조에 손대려는 듯하다. 중·참의원 각각 3분의 2 이상의 동의로 돼 있는 개헌선을 각각 2분의 1로 낮추려는 심산이다.



 이는 헌법에 대한 중대 도발이다. 문명국가들은 국가권력의 폭주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헌법 개정 요건을 일반 법률보다 까다롭게 하고 있다. 이게 경성(硬性)헌법의 취지다. 개헌선을 낮추려고 개헌한다는 건 이를 싹 무시하는 처사다. 국민을 졸로 본다는 뜻이다. 헌법이 도로교통법, 식품위생법과 같은 급인가. 헌법이 무슨 고무찰흙처럼 주물러도 되는 법인가. 일본에도 헌법학자라며 명함 파고 다니는 분들이 있다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평화헌법 99조는 각료들의 헌법 존중과 옹호 의무를 명시하지 않았나.



 아베는 은퇴하면 영화감독이 돼 야쿠자 영화를 찍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저질 영화는 작작 틀고 ‘일본의 푸른 하늘’부터 보기 바란다. 이해할 정도의 수준이 된다면 말이다.



남 윤 호 논설위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