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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황혼이혼보다 더 무서운 연금분할

중앙일보 2013.05.06 00:39 종합 36면 지면보기
신성식
사회부문 선임기자
은퇴한 권병두는 권위주의적 남편의 상징이다. 식탁에서 “나 고혈압인 줄 몰라. 음식이 왜 이리 짜?”라고 아내를 타박한다. 소파에 앉아 “나 물 한잔 갖다 줘”라고 명령조로 말하고, TV리모컨을 놓지 않는다. 아내 송금자는 “이제부터 내 인생을 살겠다”며 큰맘 먹고 운전면허를 딴다. 병두는 아내가 못마땅해 차를 판다. 아내가 “왜 상의도 안 해”라고 따지자 “내 명의로 된 차”라고 맞선다. 송 여사가 폭발한다. “말 잘했다. 아파트를 공동명의로 바꾸고, 통장 내놔라”고 말한다. “남의 통장을 넘보지 마” “그게 어째서 남의 통장이냐, 우리 통장이지”라고 옥신각신한다. 얼마 후 병두 앞으로 이혼소송 소환장이 배달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인권영화 ‘날아라 펭귄’(임순례 감독, 2009)이 그린 황혼이혼이다. 영화는 사교육·기러기아빠 등과 함께 황혼이혼을 흔한 우리들의 얘기라고 묘사한다.



 ‘날아라 펭귄’이 나온 지 4년 만에 황혼이혼이 진짜 흔한 얘기가 됐다. 지난해 결혼생활 20년이 넘은 부부 중 3만234쌍이 갈라서 신혼이혼(0~4년)을 추월했다. 20년 전(3268쌍)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다. 신혼이혼이 통일호처럼 완행으로 달렸다면 황혼이혼은 KTX였다. 신혼이혼보다 18배 증가했다.



 이혼하면서 재산 분할로 끝나면 다행이다. 다른 걸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왔다. 국민연금 분할이다. 노후 수단으로 철석같이 믿었던 국민연금도 반 토막 난다. 1999년 분할연금이 도입된 후 올 2월까지 8581명이 연금을 나눴다. 연금액 중에서 결혼기간을 계산해 절반씩 나눈다. 여자가 7592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월 평균 17만원가량을 받는다.



 이혼소송 전문 변호사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황혼이혼의 원고는 70~80%가 여자라고 한다. 애들이 클 때까지 참고 참던 송 여사 같은 중년 여성들이 반기를 든다(김삼화 변호사 분석).



 황혼이혼에는 노후 빈곤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여성 독거노인의 월소득(약 60만원)이 남성의 절반가량에 불과하고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자보다 7년 긴 점을 고려하면 분할연금을 푼돈으로 무시할 수 없다. 재혼을 해도 죽을 때까지 꼬박꼬박 통장에 꽂힌다고 생각하면 이만한 효자도 없다.



 분할연금은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를 한참 앞서나갔다. 국민연금공단 허강은 차장은 “99년 도입 당시 시대 여건을 보면 매우 빨랐던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도시자영업자 연금확대 등 다른 이슈에 가렸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남녀 성 대결에 막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국민연금 도입이 27년 앞선 일본도 분할연금은 우리보다 8년 늦었다.



 분할연금이 여성 사회안전망으로서 빛을 더 발하려면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지금은 50대에 이혼해도 61세가 돼야 분할연금을 받는다. 몇 년 후 이혼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돼 이게 싫어서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 전에 전 남편이 숨지면 물거품이 된다. 대안은 이혼 후 바로 연금이나 연금가입기간을 나누는 것이다. 캐나다·스위스·독일 등이 그리한다.



 국민연금보다 28년 먼저 시행한 공무원연금에는 분할연금이 없다. 군인·사학연금도 그렇다. 부산에 사는 한 남성은 “누님의 생활이 너무 궁핍하다. 이혼한 매형의 군인연금을 나눌 방법이 없냐”며 편지를 보냈다. 공무원-회사원 커플이 이혼하면 고액의 공무원연금은 남편이 다 갖고 아내의 ‘쥐꼬리 국민연금’은 남편과 나눠야 한다. 최근 들어 바꿔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는 것 같다. 3월 말 서울고법이 공무원연금 분할을 판결했다. 2011년 가정법원도 그랬다. 민주통합당 유승희 의원이 지난해 11월 공무원·군인·사립학교직원 연금을 분할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독일·캐나다 등 선진국처럼 퇴직·주택·개인연금 등 다른 연금도 나누는 게 시대의 흐름에 맞다.



 영화 ‘날아라 펭귄’에서 병두 부부는 황혼이혼 문턱에서 멈춘다. 복지관 춤 교실을 다니는 아내를 보고 춤바람 났다고 비난하던 병두가 몸을 낮춰 아내와 춤을 춘다. 분할연금 강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물 줘”라며 입으로만 살지 말고 아내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속이 쓰리겠지만 분할연금을 피할 방법은 없다.



신 성 식 사회부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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