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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숭례문이 애원한다 다시는 작은 불씨 큰 화마로 키우지 말라고

중앙일보 2013.05.06 00:29 종합 39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5일 오전 9시 숭례문 앞 건널목. 한 무리의 관광객이 몰려오더니 큰 소리로 얘기를 나눈다. 영어와 한국어가 섞였다. 아니나 다를까, 모처럼 한국을 찾은 재미교포 일가다. 가장 어른인 황모씨. 80이 넘었다는데 호리호리한 몸매에 걸음이 재다. 마침 5년 만에 복구된 숭례문의 첫 일반 개장을 맞아 들렀단다. “나 어릴 때는 이렇지 않았어. 일본 놈들이 다 바꿔놓은 거야.” 함께 온 아내 김모씨가 받는다. “이게 원래 모습이래요. 지난번 빅 파이어로 홀랑 탄 걸 이번에 제대로 고쳤대.” 사위쯤 되는 젊은이가 되묻는다. “빅 파이어?” “그래 큰 불. 성금 받아서 다시 지은 거야. 큰 의미가 있는 거야.”



 숭례문 광장 입구엔 벌써 70~8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문화재청 직원이 팸플릿을 나눠준다. 황씨 일가의 수군거림이 이어진다. “이게 국보 1호래” “불에 홀랑 탔다며 그래도 국보 1호야?” “워낙 중요한 문화재니까.” “그런 중요한 걸 왜 홀랑 태웠대?”



 숭례문이 다시 열렸다. 더불어 숭례문을 둘러싼 두 가지 숙제도 재등장했다. 하나는 해묵은 국보 1호 논란이다. 일제 강점기 때 아무 의미 없이 정해진 국보 1호 자리인 만큼 내놓아야 한다는 쪽과 그냥 둬야 한다는 쪽이 근 20년째 팽팽히 맞서왔다. 이번에도 일단 국보 1호 유지로 결론 났지만, 재논의 주장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불에 탔다는 게 또 하나의 빌미가 됐다. 2005년 불탄 낙산사도 복원됐지만 보물에서 해제됐다.



 다른 하나는 대형 화재의 교훈이다. 복기해보자. 2008년 2월 그날, 숭례문을 무너뜨린 건 작은 불씨 하나였다. 그 불씨가 왜 대형 화마(火魔)로 커졌던가. 책임 실종, 우왕좌왕 때문이었다. 소방차는 물만 뿌려댔다. 지붕을 뜯고 들어갔으면 불을 끌 수도 있었지만 안 했다. 문화재 파손 책임을 안 지려고 서로 미룬 탓이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이를 정부 정책에도 빗댔다. “(숭례문처럼) 큰 불이 나면 불부터 꺼야 한다. 이때 물을 좀 많이 뿌릴 수도, 화단을 밟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불을 끄고 나면 물 많이 썼다고, 화단 밟았다고 죄를 묻는다. 이게 반복되면 불 끄기보다 화단 안 밟기, 물 적게 쓰기만 신경 쓰게 된다. 이른바 면피 제일주의다. 경제 정책도 마찬가지다.”



 박근혜정부는 창조경제, 창업국가를 얘기한다. 이때 꼭 필요한 게 패자부활전이다. 그러려면 실패와 실수가 무사(無事)와 안일보다 대접받는 세상이 돼야 한다. 납작 엎드린 채 눈만 떼굴떼굴 굴리다 제 밥그릇만 챙기는 게 지혜요, 좋은 처세술로 인정받는 지금의 풍토가 사라지지 않는 한 창업국가는 요원하다는 얘기다. 5월의 햇살 아래 숭례문이 묻는 듯하다. 두 가지 해묵은 숙제, 풀어낼 준비는 돼 있느냐고.



글=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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