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빌붙어 사는 덩굴이 되진 않으리

중앙선데이 2013.05.04 00:30 321호 28면 지면보기
며칠 전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내다본 창 밖 풍경은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었다. 괜히 가슴이 설렜다. 그래서였을까? 문득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네는 살면서 사랑을 많이 해봤나?”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35>『시라노』와 에드몽 로스탕

에드몽 로스탕 (Edmond Rostand,1868~1918)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일찌감치 극작가로 성공해 서른셋이란 젊은 나이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됐지만, 몸이 허약해 시골에서 요양생활을 하다 생을 마쳤다.
원칙주의자로 일만 알고 살아온 항공 책임자 리비에르는 상대의 대답을 다 듣지도 않는다. “자네도 나랑 같군. 시간이 없었단 말이지.” 이 작품 속에서 리비에르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 됐을 것이다.

그래, 그도 나처럼 즐겁고 달콤한 것들을 언젠가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미뤄 왔을 것이다. 그러나 늙어서 삶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그런 여유를 얻는다면 그때는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랑도 있는데.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녀의 미소와 외모와 부드러운 말씨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 그저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사랑의 영원함으로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도록.”

이 시는 시한부 삶을 살던 마흔 살의 엘리자베스 배릿이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젊은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청혼을 받아들이며 지은 것이다. 두 사람은 가족의 반대로 비밀 결혼식을 올려야 했다. 하지만 위대한 사랑의 힘은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엘리자베스는 아들까지 낳고 15년을 더 살다 남편 곁에서 눈을 감았다.

사랑은 꼭 이렇게 해피엔드로 끝나지 않더라도 아름답다. 『시라노(Cyrano de Bergerac)』는 주인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비극적인 사랑을 기둥 줄거리로 한 5막짜리 운문 희곡인데, 사랑은 화려한 외모가 아니라 마음에 담긴 진실에서 온다는 당연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무적의 검술가인 시라노는 재기 넘치는 록산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만 흉물스러운 코를 가진 추남이라는 생각에 선뜻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못한다. 반면 록산은 그저 잘생겼을 뿐인 크리스티앙에게 반한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열정적인 연애편지를 써주고, 그의 영혼을 담아낸 편지 덕분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러나 크리스티앙은 곧 전쟁터에 나가 죽고 록산은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시라노는 그 후 14년간 매주 록산을 찾아가 위로해준다. 괴한의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은 날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모자를 눌러쓴 채 록산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던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읽어준다. “록산, 부디 안녕히, 난 곧 죽을 것이오! 내 마음은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을 것이오. 지금도, 저 세상에 가서도 당신을 한없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당신을….”

어느새 황혼의 어둠이 짙게 깔리지만 시라노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나간다. 록산은 시라노가 지켜 왔던 숭고한 침묵의 진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그 편지를 읽을 수 있죠, 이렇게 어두운데? 아! 너무나 많은 것들이 죽고…태어나는군요! 왜 지난 14년 동안 입을 다무셨나요? 이 편지에 남은 이 눈물은 당신이 흘린 것이었나요?”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항상 너무 늦게 온다. 시라노는 칼을 치켜든 채 죽음의 여신을 향해 마지막 대사를 외친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고?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늘 성공할 거라는 희망으로 싸우는 건 아냐! 헛된 명분을 위해 의미 없는 싸움을 해왔으니까!”

『시라노』는 1897년 초연 이후 500회 연속 공연됐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에드몽 로스탕은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인 이 주인공에게 기형적으로 거대한 코라는 외적 장애를 준 대신 더욱 헌신적인 사랑을 구현토록 했다. 게다가 세상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당당한 정신은 시라노를 더욱 멋진 인물로 만들어 준다. 유력자에게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부와 영광이 올 것이라는 친구의 말에 시라노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 난 싫네. 남을 짓밟고 올라가 출세하고 패거리를 만들어 우물 안 우두머리가 되어야 하나? 나는 떳떳하게 행동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 없도록 할 걸세. 참나무나 떡갈나무는 못 되더라도 빌붙어 사는 덩굴이 되진 않을 걸세. 아주 높이 오르진 못해도, 혼자 힘으로 올라갈 걸세!”

처음부터 록산이 사랑했던 것은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니라 고귀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물론 그것은 시라노가 대신 써준 편지에 담긴 것이었다. “그 작은 종이들 한 장 한 장은 훨훨 나부끼는 당신 영혼의 꽃잎들 같았어요. 불꽃 같은 당신 편지의 단어 하나하나에서 강렬하고 진실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 내가 사랑하는 건 오로지 당신의 영혼뿐이에요! 처음에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당신의 아름다운 외모는 내가 더 잘 볼 수 있게 된 지금, 더는 보이지 않아요!”

『어린 왕자』의 그 유명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가? 어린 왕자와 헤어지면서 여우가 선물로 가르쳐준 비밀 말이다. “제대로 보려면 마음으로 봐야 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