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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함은 뇌가 느끼는 ‘좋음’ 중 하나이기 때문?

중앙선데이 2013.05.05 01:57 321호 25면 지면보기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귀스타브 쿠르베 작, 1865). [위키피디아]
미국에서 겨우 10만 권 팔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선 100만 권 이상 팔렸다. 그리고 샌델 교수는 그 어디에서보다 더 많은 강사료를 받으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강연을 하곤 한다(결국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돈만 많이 내면 살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우선 잊어 보자). 이유야 어쨌든 ‘경제민주화’ ‘재벌 때리기’ ‘빈부격차’ 등이 화두인 2013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의’가 중요한 이슈인 건 확실해 보인다. 샌델 교수가 동일한 웅변술과 재치 있는 스타일로 ‘우표 수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면 그다지 성공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는 말이다.

김대식의 ‘Big Questions’ <7>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1 쓰레기장에서 사는 어린아이(인도). 2 부촌 바로 옆 빈민촌(브라질).
몇 년 전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영화가 인기였다. 정상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뭄바이 쓰레기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불쌍해하고 분노하거나 또는 우울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화난 것일까? 만약 우리 스스로도 쓰레기장에 산다면 어떨까?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쓰레기장에 산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그 자체가 쓰레기장이라면 쓰레기장에 산다는 사실에 화낼 이유가 없겠다. 은하수 한구석에 처박혀 평생 지구라는 돌덩어리와 중력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지 않듯 말이다. 쓰레기장 아이들이 불쌍한 이유는 어딘가 수영장에서 물놀이하고 있을 부촌 아파트의 다른 아이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하게 우리는 소중한 무엇을 빼앗은 사람에게 분노하며 정의를 요구한다. 어렵게 장만한 집이나 차를 훔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우리에겐 정의이며, 단 하나뿐인 목숨을 빼앗은 자에 대한 분노는 극치에 다다라 거꾸로 그들의 목숨을 요구하기도 한다. ‘눈에는 눈’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설득력이 여기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무한의 목숨이 있다면 어떨까? 어쩌면 나를 살인한 사람하고도 즐겁게 웃을 수 있겠다. 마치 나의 수많은 머리카락 한 가락을 뽑은 사람에게 대하듯 말이다.

누구나 동의할 ‘정의’ 개념을 만들 수 있나
플라톤의 ‘에우튀프론’에서 ‘신들이 정의를 원한다’라고 주장하는 에우튀프론에게 소크라테스는 그럼 신들이 무언가를 “정의롭기 때문에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원하기 때문에 무언가가 정의로워지는지”라고 묻는다. ‘정의란 무엇 무엇이다’라고 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 무언가를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당화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세상에 지각 능력이 없는 존재들만 있다면 ‘정의로운 세상’이란 무의미하다. 돌멩이와 지렁이 사이엔 ‘정의’란 단어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우주에 나 혼자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모두가 이 세상 모든 걸 가질 수 있다면 역시 ‘정의’란 무의미하다. 결국 정의는 인지·감정·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한정된 것을 나눌 때 느끼는 분배 패턴의 정당성이지, 나눠지는 그 무언가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나누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 우선 생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n분의 1로 나누거나 각자 필요한 만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이상적 패턴을 마르크스는 경제학적으로 뒷받침하려 노력했지만 문제 있어 보인다. 더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 인센티브가 희미해지며, 내가 소유한 재능과 노동력을 통해 생산한 것들을 투자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짜증 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프루동같이 어차피 ‘개인 소유’란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소유한 재능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거나, 교육을 통해 얻거나 책에서 읽었을 것이다.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매번 연관돼야만 나의 재능과 노동력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나 땅 역시 독립적으로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기에 사회의 도움을 얻어서만 생산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한 특정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프루동은 그래서 “모든 개인 소유는 도둑질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개인의 모든 재능과 시간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동일한 공헌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주장은 지나쳐 보인다.

로버트 노직
반대로 아무도 사회로부터 100% 독립적인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당연해 보이지만, 그게 바로 자유론자 로버트 노직의 핵심 아이디어였다. 노직은 정의와 분배 패턴의 상호관계 그 자체를 부정한다. 합법적으로 얻은 자원에 내 재능과 시간을 투자해 생산한 결과물은 내가 소유하거나 시장에서 정당한 가격을 받고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동의 없이 나라에서 가져가는 세금은 결국 나의 재능과 시간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정부에서 가져간 만큼의 재능과 시간을 고로 나는 사회에 무료 헌납한다는 말이고, 동의 없는 재능과 시간의 헌납은 노예나 하는 짓이므로 모든 세금은 결국 노예제도라 할 수 있다.

프루동과 노직이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세상 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장소는 노직이 활동했던 하버드대학교 근처 리걸 시 푸드(Legal Sea Food)라는 꽤 괜찮은 레스토랑이다.

프루동=…그럼 무슈 노직은 만약 세상의 99% 식량을 제가 소유해 대부분 먹지 못한 채 썩어서 버리더라도 식량의 일부를 사회가 세금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말인가요? 집 앞에서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노직=그렇습니다. 정의가 분배의 패턴이고, 사회가 그 패턴을 정할 수 있다면 정당하게 얻은 개인의 소유를 정부가 제멋대로 손질할 수 있게 됩니다. 굶는 아이를 위해 제 것을 동의 없이 가져갈 수 있다면 나중엔 그 아이의 옷을 위해서, 그리고 다음엔 그 아이의 대학 교육과 새집을 위해 맘대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그래서 정부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규제화하는 순간 우리는 정부 노예제도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고 했지요….

프루동=무슈 노직은 ‘정당한’ ‘나의 소유’라는 단어를 자주 쓰십니다만… 선생님의 그 ‘정당한 소유’ 역시 사회가 마련해 주고 보호해 주는 것 아닌가요? 알몸으로 태어나 하버드대 교수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던 건 뭄바이 쓰레기장의 아이보다 단지 우연히 더 좋은 부모, 고향, 신경세포들을 가진 선생님이 사회로부터 더 많은 부를 훔쳤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공로 없는 우연과 확률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항의하려는 노직을 막으며) 그렇다면 벤담이 추구한 사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행복지수는 어차피 로그(log) 함수로 증가하기 때문에 제가 10조를 가졌든, 11조를 가졌든 더 이상 큰 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겐 무의미한 1조를 세금으로 걷어 가난한 10만 명에게 나눠주는 게 사회 전체 행복지수를 더 최대화하지 않나요?

노직=그런 공리주의 난센스에 따르면 한번 지하실에 갇혀 노예로 일하는 10명의 아이들이 10만 개의 명품 백을 만든다고 상상해 봅시다. 10만 소비자의 행복 덕분에 사회 전체 행복지수는 늘어나겠지요. 하지만 그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노예로 살아도 된다는 위험한 말입니다.

프루동=선생님 같은 자유론자가 아이들의 행복을 걱정한다는 게 신기하군요….

노직=(못 들은 척하며) 그럴 바에야 하버드대 제 옆 방 동료였던 롤스의 정의론이 더 설득력 있겠네요. 효율적이면서도 정의로운 사회란 차별된 분배의 패턴을 통한 최소 수혜자에게도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이 생겨야 한다는.

프루동=…거기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모델을 도입했지요. 정의로운 분배 패턴에 대해선 사회적 강자와 약자가 어차피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뭄바이 쓰레기장 아니면 빌 게이츠의 자식으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한 후 적절한 분배 패턴을 정하라는 거였지요. 아는 게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정의로움이군요.

노직=‘무지의 베일’은 귀여운 아이디어지만 비현실적입니다. 나는 나이기에 ‘만약 내가 아니라면’이란 무의미합니다. 무지의 베일엔 항상 ‘나’라는 구멍이 뚫려 있다는 말이지요. 비슷하게 칸트는 공리주의식 결과보다 도덕적 동기를 더 강조했지만 정말 그가 원하듯 우리 ‘동기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 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개인 동기의 정의성을 보편적 입법의 정의성을 통해 판단한다는 건 단순히 말장난 아닌가요? 결론은 항상 같습니다:정의는 그 어떤 분배의 패턴도 아닙니다!

프루동=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노직’ 이라고 불리는 ‘나’는 왜 ‘노예제도’보다 ‘자유’를 더 선호할까요? ‘나’는 나의 뇌고 나의 기억입니다. 그런 ‘뇌’에겐 확실히 ‘좋고’ ‘싫고’가 있습니다. 음식과 물은 좋고 배고픔과 아픔은 싫습니다. 독립적인 판단과 행동은 대부분 뇌에겐 ‘좋음’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자유론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거지요. 하지만 ‘공평’ 역시 뇌에겐 ‘좋음’ 중 하나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 영장류의 뇌는 공평한 나눔을 경험할 때 ‘좋음’을 느끼고, 불공평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정의를 기대하는 건 마치 자유를 기대하듯 공평 역시 뇌의 기본 행복 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자유이든 공평이든 우리가 꼭 뇌의 성향을 따라야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자유는 본능이기에 지켜야 하나 공평은 본능이어도 지킬 필요 없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반박하려는 노직을 막으며) 그나저나 너무 늦었네요. 계산은 어떻게 할까요? 저는 샐러드 하나 먹는 사이에 선생님께서는 가장 비싼 바닷가재를 드셨군요. 각자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먹은 만큼 내지요….

노직=(당황하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우리 그냥 n분의 1 할까요?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했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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