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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믿음]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중앙선데이 2013.05.05 02:08 321호 27면 지면보기
더운 여름 시원한 수양버들의 흔들림을 연상케 하고, 추운 겨울 잡아주는 따뜻한 손길 같은 그림을 그리던 친구가 있었다. 청초한 친구는 그림처럼 얌전하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으며, 잘 가꾼 화초처럼 바른 자태를 지녔다. 그를 보고 있으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대하고 있는 듯했다. 유독 말수가 적어서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여성스러움과 고요함의 언저리엔 불타는 분노가 있었다. 나는 그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먼저 말하지 않는 이를 재촉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기에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친구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건 3년 만이었다. 그간 사람들을 만나며 숱한 사연을 접했지만 그녀의 사연처럼 강렬한 충격은 처음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지만, 친구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 작은 표정 하나에도 신경을 썼다. 사연은 이러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한 여성이 부유한 집안의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시작은 좋았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편에게서 이상한 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국내 출장은 물론 해외 출장도 잦았다. 한 달에 절반 이상을 밖에서 보냈다. 시집 식구들은 궁금해 하는 친구에게 말을 얼버무렸다. 뭔가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친구는 남편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곧 한 여성의 존재가 드러났다. 사람 심리가 그런 건지, 떨리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누군지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친구는 말했다. 망설임 끝에 그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남편과의 관계를 인정하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한 친구를 오히려 조롱했다고 한다. 한데 이보다 더한 충격이 있었다. 남편은 상습적인 도박꾼이었다. 절망한 친구는 시어머니에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물었다. 시어머니는 결혼 전에 끊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그 얘기를 듣고도 남편을 직접 만나서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명한 도박장을 다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마카오로 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구는 달려갔다. 찾아간 곳은 호텔이었다. 친구는 남편이 가르쳐준 번호로 전화를 했고,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여권을 빼앗은 뒤 그녀를 감금했다.

남편이 도박 빚 대신 아내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친구는 며칠을 호텔방에 갇혀 있어야 했고, 결국 시집과 친정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오게 됐다고 한다. 그 후 친구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고, 남편과의 관계도 상처투성이로 끝났다. 그래도 천만 다행인 건 그 친구가 지금 이 얘기를 내게 덤덤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만남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들여다보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상처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처를 보듬고 미소 짓는 사람도 있다. 출가한 후 시간이 갈수록 절망한 이들의 진실이 더욱 크게 들려온다. 하여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암울하고 아픈 상처를 가진 모든 분에게 5월의 따사로운 봄의 숨결 아래 붓다의 평온한 에너지를 보냅니다. 부디 애잔한 아픔일랑 녹여내고 가슴에 사랑 가득한 안온한 날들 되소서.”



원영 조계종에서 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아사리. 불교 계율을 현대 사회와 접목시켜 삶에 변화를 꾀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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