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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유런, 국·공 ‘인재쟁탈전’ 0순위에 오르다

중앙선데이 2013.05.05 02:25 321호 29면 지면보기
1948년 5월 20일, 국민정부 관원들과 함께 총통 취임식장에 입장하는 감찰원장 위유런(오른쪽).
1949년 초,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패배를 예감했다.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에게 “재덕을 겸비한 준재가 구석에서 썩는 경우가 많다. 애석한 일이지만, 사교성 외에는 쓸모라곤 한 군데도 없는 것들이 요직을 꿰차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관건은 사람이다. 인재 확보를 서둘러야 한다”며 타이완(臺灣)으로 이전시킬 사람들의 명단을 건넸다. 앞줄에 위유런(于右任·우우임) 석 자가 선명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0>

승리를 확신한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신신당부했다. “4년 전, 충칭에 갔을 때 위유런과 함께했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대륙을 떠나지 말라고 연락할 방법을 찾아라.” 두 사람의 인연은 저우언라이도 익히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위유런은 1924년 1월 광저우(廣州)에서 열린 ‘제1차 국민당 전국대표자 대회’에서 처음 만났다. 중앙 집행위원에 선출된 위유런은 노동자농민부장(工人農民部長)을 겸했다. 후보 중앙위원에 뽑힌 마오쩌둥에게도 선전부장 자리가 돌아왔다. 위유런 45세, 마오쩌둥 31세 때였다.

2년 후에 열린 2차 대회에서도 마오쩌둥은 후보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국민당 중진 위유런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마오는 14세 연상인 위유런을 잘 따랐다. 일거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찾아갈 정도였다.

타이베이 시절 서재에서 서예에 열중하는 위유런. [사진 김명호]
유희(遊戱)로 끝났지만, 항일전쟁 승리 직후인 1945년 8월 29일부터 43일간, 전시 수도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담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충칭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오쩌둥의 숙소를 찾았다. 마오는 평소 글로만 접하던 사람들을 원 없이 만났다.

위유런만은 예외였다. 8월 30일, 저우언라이와 함께 직접 찾아갔다. “청년시절 위유런의 글을 읽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앉아서 만날 수 없다. 못 만나도 상관없으니 미리 연락하지 마라. 예의가 아니다.” 당시 위유런은 흔히들 ‘민주의 집(民主之家)’이라 부르던 민주인사 셴잉(鮮英·선영)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날 따라 위유런은 샤오빙(화덕에 구은 빵, 맛은 별로 없지만 위유런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고향 특산물이라며 유난히 좋아했다) 사먹으러 나가는 바람에 집에 없었다. 소문을 들은 장제스의 비서실장은 그날 밤 열린 마오쩌둥을 위한 연회에 위유런을 초청했다.

위유런도 9월 6일 점심에 마오쩌둥을 초대했다. 위유런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려면 시장을 잘 봐야 한다”며 며칠간 충칭 시내를 누볐다. 당일 날은 새벽 시장에 나가 갓 잡은 돼지고기와 신선한 야채를 골랐다. 요리사들과 주방에 들어가 중요한 요리는 직접 만들었다.

이날 마오쩌둥은 위유런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붓글씨와 시(詩)를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치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마오는 싱글벙글했다. 저우언라이에게 “위유런이 내 시와 글씨를 극찬했다”며 칭찬 받은 애들처럼 좋아했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위유런의 사위 취우(屈武·굴무)를 불렀다. 취우는 장징궈,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등과 모스크바 유학 동기생이었다. 국·공 양당의 인사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특히 덩샤오핑과는 “네 이름이 건방지다. 샤오핑(小平)이 없어도 작은(小) 평화(平)는 이룰 수 있다”며 놀릴 정도로 친했다. 장징궈와는 모스크바 시절, 여자친구들이 서로 가깝다 보니 덩달아 친해진 사이였다.

저우언라이는 취우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난징으로 떠나라. 장인을 찾아가 내 말을 전해라. 우리 군대가 양자강을 건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난징이 점령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 드려라. 우리가 비행기를 보내 모셔올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고 계시라고 해라. 마오 주석의 뜻이다. 명심해라.”

장제스는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보다 동작이 빨랐다. 취우가 도착했을 때 위유런은 난징에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허사였다.

장제스가 파견한 4명의 특무요원들에게 정중하게 납치당한 위유런은 한동안 광저우와 홍콩을 떠돌았다. 상하이에 머무르는 동안,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1월 26일 장제스가 보낸 비행기를 탔다. 눈 떠보니 충칭이었다.

충칭 도착 3일 후, 장제스의 저녁 초청을 받았다. 대륙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그날 밤, 장제스 부부와 함께 타이완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안(西安)에 있는 부인과 딸에겐 곧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 낯선 섬나라에서 고독한 생활이 시작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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