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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칼럼] 악을 권하는 사회

중앙일보 2013.05.04 00:58 종합 33면 지면보기
박선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수영을 좋아해 교내 수영장을 즐겨 간다. 수영장의 레인은 상급·중급·초급으로 구분돼 있어 입수 때마다 내 수영 실력의 상중하(上中下)를 고민하곤 한다. 그러다 대만으로 교환학생을 간 뒤 수영장을 갔던 날이었다. 거기선 어떤 레인을 써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이내 무안해지고 말았다. 레인이 상중하가 아닌 만속(慢速), 쾌속(快速)으로 구분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수영을 하는 내내 우리가 모든 것을 상중하로 나누는 것에 얼마나 많이 길들여져 있는지 깊이 깨달았다.



 최근 일어난 대기업 임원의 항공사 승무원 폭행사건, 일명 ‘라면 상무’ 사건은 우리가 개인의 능력을 상중하로 평가하는 것을 넘어 인간관계를 갑과 을로 나누는 것에도 익숙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상중하가 개인의 능력차를 넘어 이젠 인간 간의 권력관계까지도 장악해버린 것이다.



 포스코의 한 임원이 고백했듯 갑마저도 자신의 ‘갑 노릇’을 인정하는 세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 사회엔 갑만 될 수 있다면 어떠한 부당한 수단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한국에서 문제유출 혐의로 SAT시험이 취소된 것은 예견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많은 사건이 갑을 관계의 폐해에 경종을 울려 왔다. 지난해 트위터에서 유행했던 ‘대나무숲’이나, 개그콘서트의 ‘갑을 컴퍼니’가 풍자로 시작한 것이라면 교수의 부당한 대학원생 착취나 기업의 내부비리를 고발한 사건들은 자신의 지위를 담보로 한 고발이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 백화점 직원들의 자살 등 안타까운 사연은 을의 소외를 생명을 통해 아프게 표현한 사례였다.



 현진건이 ‘술 권하는 사회’를 말했다면, 이제는 ‘악(惡)을 권하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실력의 상중하는 자연스레 갑을 관계로 이어지고, 을은 한없이 착취당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에게 ‘갑이 되라’고 외친다. 승자를 축하하는 시스템은 있지만 패자를 위로하는 시스템은 없다. 갑이 되기 위해서는 부정마저도 감수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부당한 갑의 착취에 을이 대응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내일은 어린이날이다. 요즘 유행하는 MBC의 ‘아빠 어디가’를 볼 때마다 아이들의 순수함에 반하고 나의 때묻음에 실망한다. 모든 이를 차별 없이 바라보는 아이들과 달리 갑이 되기를 권하는 사회에서 지금까지 소수의 갑은 얼마나 많은 특권을 누렸고,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을들이 희생당해 왔던가. 상(上)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모두가 갑이 되라고만 하는 사회는 모두에게 악을 권하는 것과 다름없다. 모두가 갑이 될 수 없다면 이제는 이 땅의 을들의 숨통을 터주며, 갑이 되기 위해 악을 권하는 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 땅의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까지도 악을 권할 것인가.



박선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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