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공한 조기유학 세대 … 사표 내고 '알비노 어린이' 친구가 되다

중앙일보 2013.05.04 00:51 종합 18면 지면보기
가장 좋았던 순간을 묻자 신세용 이사장은 “지금 이 순간, 평생을 바치고 싶은 일을 하니 매 순간이 행복하다”며 수줍게 웃었다. 촬영 내내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가출 소동까지 벌이며 미국으로 떠났다. 숱한 인종차별과 폭언에 시달렸지만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당당하게 버텼다. 1992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당시의 치열한 유학 생활을 담은 『나는 한국인이야』라는 책은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유명 소설가 양귀자의 신작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이후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해 정치·경제·철학부(PPE)를 졸업한 뒤 KAIST 경영대학원에서 금융공학을 공부했다. 이후 금융회사를 창립해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며 갑작스레 사표를 던졌다. 국제아동돕기연합 신세용(38) 이사장 얘기다. 서울 역삼동 국제아동돕기연합 사옥 1층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에서 유명세를 탔던 시절로 시곗바늘을 돌렸다.

아프리카 어린이 돕는 '38세 풍운아' 신세용
"밀항하겠다" 부모 졸라 13세 때 유학
말 안 통해 차별, 하루도 안 운 날 없어



 - 왜 미국이었나.



 “두 살 터울 형이 먼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 잠시 들어왔는데 완전 딴 사람이 돼 왔더라. 말하는 것도, 생김새도 전부 달라졌다. 유치원 때부터 ‘도대체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뭘까’ 늘 궁금해 했는데 형을 보고는 ‘미국에는 그 힘이 있나 보다’라고 막연히 생각하게 됐다. 그게 시작이었다.”



 - 부모님이 반대를 안 했나.



 “어머니에게 ‘10년 동안 아들 없는 셈 치세요. 성공해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편지를 써놓고는 친한 친구들이랑 밀항 계획을 세웠다. 배를 타고 미국까지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금세 들켜버렸다. 정말 무서웠는데, 아버지는 ‘그렇게까지 가고 싶으면 가라’며 오히려 격려해 주시더라. 결국 ABCDEFG, 즉 G까지만 아는 채로 무작정 떠났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미국행에 성공했지만 유학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사관학교(Miler school)에 입학했지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간단한 지시사항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늘 방에서 외롭게 있어야 했고, 동양에서 왔다는 이유로 따돌림도 당했다.



지난 3월 탄자니아 탕가를 방문한 신세용 이사장이 알비노 어린이 환자와 포즈를 취했다(사진 위). 그가 마을을 찾아갈 때면 아이들은 ‘세용~세용’하며 그의 주위로 몰려든다. [사진 UHIC]
 - 인종차별이 많이 심했나.



 “1년간 하루도 안 빼고 울었다. 밥도 매일 혼자 먹었다. 내가 테이블에 앉기만 하면 애들이 떠났으니까. 자고 있는데 갑자기 들어와 얼굴 위에 베개를 놓은 뒤 야구 방망이로 때리기까지 했다. 그게 무서워 침대 밑 바닥에 숨어서 잘 정도였다. 나중에 병원에 갔더니 뼈가 14군데나 부러졌다고 했다. 하도 맞아서.”



 - 그 정도인데 한국 안 오고 어떻게 버텼나.



 “외로움을 친구로 사귀었다고 해야 할까. 곰인형을 친구 삼아 매일 얘기하며 지냈다. 영어를 못해서 겪는 차별이라 생각해 미친 듯이 아이들 발음을 흉내내고 사전을 먹을 듯이 단어를 외웠다. 포기하고 돌아가면 세상의 그 어떤 일이 다가와도 못 이겨낼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이겨냈다. 학교에서도 조금씩 인정을 받았고 편드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용기를 내 힘들었던 생활을 정리해 책도 냈다. 어린 소년의 당찬 유학기에 격려와 성원이 잇따랐다. 교도소 수감자에게서는 “신세용군 덕분에 힘을 내게 됐다”는 팬레터도 받았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은 잠깐이었다. 갑자기 너무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수업 중에도, 공부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그냥 쓰러졌다.



 - 큰 병에 걸린 건가.



 “의사들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했다. 도저히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 1년간 휴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쉬어야만 했다. 이러다간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3이 되면서 대학 대신 4년간 여행을 다니기로 결심했다. 남은 인생 내 맘대로 살고 싶었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에 대한 답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신씨는 대학에 갔다. 그것도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학에 진학했다.



 -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가.



 “형이 옥스퍼드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직접 한번 와 보라’고 초대했다. 갔더니 고풍스러운 건물에, 그윽한 안개에, 고대 철학가와 사상가가 다 나올 것만 같았다. 여기서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1년간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에서 12학년이면 한국으로 치면 고3이라 게임 끝난 거였는데 정말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공부했다.”



 - 대학 생활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고3 때 바짝 한 공부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책 20권 읽고 7쪽짜리 에세이 쓰는 걸 1주일에 두 번씩 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꿈에서도, 화장실에서도 논문 생각만 떠오를 정도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나니 2시간 동안 30권 읽고 에세이 4쪽 써도 ‘Excellent’ 등급을 받을 정도가 되더라. 신기했다. ‘하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있던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의 답은 결국 대학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질문을 통해 그 답을 찾는 과정이 결국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세상을 움직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우선 돈이 필요했다. KAIST에 들어가 금융시장에 대해 배웠다. 그가 전국 증권투자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자 금융회사들의 러브콜이 쏟아졌다.



 27세 때 그는 ‘유틸리안’이란 금융회사를 세운 뒤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그러던 그가 2년 뒤 갑자기 사표를 던졌다. 사람들은 “미쳤다. 건방지다. 정치하려고 그러느냐”며 만류했다. 하지만 잠시 잊고 있던 꿈이 다시 그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국제아동돕기연합(UHIC·United Help for International Children)’의 시작이었다.



 - 정말 잘나갔는데.



 “500만원으로 넉 달 만에 3억원을 만들었다. 알고 보니 내가 금융 쪽에 재능이 있더라. 돈이 계속 모였고, 어느 순간 돈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내가 뭐 하고 있지’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금융이란 건 제로섬 게임이나 마찬가진데, 내가 돈을 따면 누군가는 돈을 잃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게 서글펐다. 잘할 순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바로 사표를 썼다. 그러곤 사무실을 차리고 국제아동돕기연합이란 이름을 걸었다.”



 - 첫 시작치고 이름이 너무 거창한 것 아닌가. 아무도 안 도와줬을 것 같은데.



 “내가 원래 이름을 좀 잘 짓는다(웃음). 정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금융할 땐 수십억원씩 투자하라며 내주던 친구들이 후원금 좀 달라니까 한 달에 2만원 나가는 것도 아까워하더라. 하지만 친구들 2명과 단칸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워 일해도 정말 재밌었다. 홈페이지도 직접 만들고, 브로슈어도 만들고. 그러면서 조금씩 노력을 인정받았다.”



 국제아동돕기연합은 현재 필리핀·인도네시아·탄자니아 등 8개국에 아동건강센터와 보건소·병원 등을 세워 아이들의 건강 증진을 돕고 있다. 국내에서는 공부방 결연 사업을 통해 아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현지인 여성들을 뽑아 교육시킨 뒤 오지마을의 아이들을 돌봐주게 하는 ‘키퍼 프로젝트’와 미혼모들을 교육시켜 자립할 수 있게끔 돕는 ‘나비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인 사업이다. 독특한 프로그램이 현지에서 인정을 받자 유엔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유엔경제사회이사회의 비정부기구 특별자문기관으로 공식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는 탄자니아에 있는 3만여 명의 알비노 어린이 보호 캠페인에 집중할 예정이다.



 - 왜 알비노 어린이인가.



 “알비노 환자들은 선천적 색소 결핍으로 피부와 눈·털 등에서 백색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들이다. 이들 대부분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40세 이전에 죽어간다. 그런데 탄자니아에는 ‘알비노의 신체를 먹거나 부적으로 가지고 다니면 질병이 낫는다’는 황당한 얘기들이 나돈다. 어린 알비노 환자들의 목을 베어 피를 받아 마시거나 갓난아기 환자의 사지를 절단해 주술사에게 팔아넘긴다. 이 때문에 탄자니아의 알비노 어린이들은 1년에 30명 이상 납치돼 끔찍하게 죽는다. 무덤까지 파헤쳐질 정도다.”



 - 그런 일이 있는데 정부는 방관하나.



 “현지 정부도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아직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몰라 일단 열심히 알리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진에어와 화장품회사 비욘드와 함께 알비노 어린이들을 위한 자외선 차단제 보급 운동을 시작했다. 선크림을 하나 사면 또 하나가 자동 기부되는 시스템이다. 또 대한항공과 함께 두 달에 한 번씩 1일카페를 열고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기 위한 모금 활동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



 신씨는 1년에 2~3번씩 직접 탄자니아를 찾아 아이들과 어울린다. 지난 3월에도 20여 일간 탄자니아에 다녀왔다. 아이들이 ‘세용’ ‘세용’ 하며 품에 안길 때면 “반드시 너희를 지켜줄게”라고 다짐하게 된다고 했다. 미국 유학 시절 동양에서 왔다는 이유로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신씨는 아직 미혼이다. “80세가 되어 한 달을 살더라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그에겐 이 어린이들이 가장 큰 사랑인 듯 보였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알비노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할 거다. 길을 발견하면 전 세계와 공유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고. 국제아동돕기연합이 더 커지면 이사장직을 반납하고 봉사현장을 찾아다닐 생각이다.”



글=송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