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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실수 족집게처럼 잡고 관용구에도 능통

중앙선데이 2013.04.28 00:33 320호 8면 지면보기
지난 12일 청와대를 예방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왼쪽)과 환담하는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케리 장관이 질문을 연발하자 “You ask a lot of questions(질문을 많이 하시네요)”이라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You ask a lot of questions!(질문을 많이 하시네요)”
지난 12일 청와대에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을 접견한 박근혜 대통령은 케리 장관과의 대화 중 이렇게 말했다. 케리 장관이 잇따라 질문을 쏟아내면서 30분으로 예정됐던 접견이 75분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케리 장관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박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해 전달하기 위해섭니다”라고 해명했다. 좌중엔 웃음이 감돌았다. 박 대통령은 한·미 원자력협력협정 문제로 대화를 돌리면서 다시 영어로 얘기했다. “last but not least…If not the most important(마지막 사안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사안입니다).” 무게가 실린 어투였다. 케리 장관의 표정은 진지해졌다.

박 대통령의 영어 실력 어떻길래


#지난 17일 오전 청와대. 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를 접견한 박 대통령은 “(내가) 지난해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됐을 때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서한을 보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통역은 ‘전당대회’를 ‘Party Congress’라고 전달했다. 그 순간 박 대통령은 “Party Convention”이라고 직접 바로잡았다. 이어 영어로 “두 단어는 굉장한 차이가 있죠(There is a big difference between a Party Congress and a Party Convention)”라고 말했다. 통역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투가 아니라 부드럽고 유머가 섞인 말투였다고 한다. 통역은 식은땀을 흘렸지만 참석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박 대통령의 ‘영어 외교’가 화제다. 통역이 오역하면 직접 영어로 바로잡고, 면담을 끝내고 방을 나가는 외빈과 영어로 사담(私談)을 하기도 한다. 국내 인사와 면담하거나 연설할 때도 강조하려는 대목을 영어로 표현하는 일이 잦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외교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박 대통령의 영어를 들어본 외국 인사들은 “미국식 억양으로, 오랜 시간 익힌 게 느껴지는 세련된 표준 영어”라고 평했다고 한다.

“Party Congress 아니고 Party Convention”
지난달 29일 밥 코커 미 상원 외교위원회 간사를 만난 자리에서도 박 대통령은 큰 오역(誤譯)을 하나 잡아냈다. 박 대통령은 “2016년부터 우리의 핵폐기물저장소가 포화되기 시작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통역은 “our nuclear waste storage facilities will be saturated by 2016 (폐기물저장소가 2016년에 포화될 겁니다)”라고 전달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영어로 “will start to fill up from 2016(2016년부터 포화되기 시작합니다)”라고 직접 정정했다. 흘려보내기 쉬운 전치사 하나를 잡아내 말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막은 것이다.

박 대통령의 통역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았던 이성환(37) 행정관이 맡고 있다. 그는 외교부 차관을 지낸 이태식(68) 전 주미 대사의 차남이다. 고교 2학년까지 외국에서 공부하고 프린스턴대에서 연수도 했다. 그때 익힌 영어 실력이 외교부에서 톱 클래스로 꼽힌다. 노무현 정부 시절 방한했던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미 국방장관은 이 행정관의 영어를 듣고 “미국인보다 영어를 더 정확하게 사용한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런 이 행정관도 “박 대통령의 통역을 맡을 때마다 긴장되고 떨린다”고 토로했다. 자신이 통역하기 전에 박 대통령이 외빈의 말을 이미 알아듣고 웃는다든지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잦은 데다 오역을 족집게처럼 집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행정관은 매일 박 대통령의 면담 기록이나 연설문을 빠짐없이 숙독하면서 적절한 영어 표현을 연습한다는 것이다.

관용구(idiom)를 즐겨 쓰는 것도 ‘박근혜 영어’의 특징이다. 지난 11일 투자기업 오찬 간담회에서 박 대통령은 “better late than never(늦게라도 간담회를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좌중엔 폭소가 터졌고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지난달 25일 청와대를 예방한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이 “북한이 동맹(한국)을 공격하면 미국은 반드시 군사 대응을 할 거라고 의회에서 강조했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Did the message get across to them?(북한이 그걸 제대로 이해했나요?)”이라고 영어로 물었다. 지난 5일 법무부 업무보고에선 영어로 “Crime does not pay(범죄는 소용없다)” “It’s the thought that counts(중요한 건 생각)”이란 표현도 썼다.

박 대통령의 영어는 야당 의원들과의 만남에서도 등장한다. 지난 12일 민주통합당 지도부와 박 대통령의 식사 자리에서 김영주 의원은 “(파생금융상품) 키코(KIKO) 때문에 고통받는 피해자들이 있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식사가 끝날 때쯤 김 의원은 박 대통령에게 “다른 의원들 얘기는 수첩에 적던데 내 말은 적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웃으며 “ ‘KIKO’라고 영어로 적었어요”라고 반응했다.

전문가 “공식 석상에선 한국어 써야”
박 대통령은 지난 24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에서 영어를 쓰는 이유와 공부 비결을 직접 밝혔다. “외국어는 배워놓으면 친구 만드는 데 좋은 역할을 한다. 대화를 그 나라 말로 하면 서툴러도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나…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 시간을 짬짬이 내 외국어 공부를 했고, 어머니(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하면서 많은 외국 손님을 만났을 때 그것을 유용하게 썼다.” 자서전에서도 “영어는 어린 시절 청와대에 살면서 미국인 교사에게 과외를 받았다”고 밝혔다.

젊을 때 정상 외교 무대에서 영어 실력을 닦은 경험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영어를 활용하는 배경이 됐다는 얘기다. 당시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나가면 직접 영어로 연설했다. 내공이 쌓이면서 27세 때인 1979년 지미 카터 미 대통령 내외가 방한했을 때 통역 없이 영어로 장시간 대화했다.

2010년 1월 서울을 찾은 로버트 킹 미 북한인권특사가 박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의원)을 접견했다. 이 자리에 배석했던 새누리당 구상찬 전 의원은 “통역된 내용을 적어 접견 뒤 언론 브리핑을 하려 했는데 박 대통령이 킹 특사와 유창한 영어로 대화해 브리핑을 하지 못한 해프닝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외교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반드시 통역을 써 혼선을 피하고 기록을 남기는 게 박 대통령의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모 대학 영어학 교수는 “영어는 이제 영국·미국의 말이 아니라 ‘Lingua Franca(세계어)’다. 우리 대통령이 국내 인사들과 대화에서 메시지를 강조하려고 영어를 쓰거나, 외국 인사와의 만찬 등 비공식 석상에서 친근감을 높이기 위해 영어를 쓰는 건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외국 정상과의 공식 회담이나 연설 등에선 반드시 통역을 써 한국어로 말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통역을 쓰면 말하기에 앞서 생각할 시간이 생기고, 혼선을 예방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 대통령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박 대통령이 다음 달 방미 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영어를 쓸지는 27일 현재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영어 연설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을 의식한 측면이 있어서다. 과거 미 의회에서 연설한 한국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노태우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어, 김영삼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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