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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보기’로 개혁 관철, 복지국가 기틀 다지다

중앙선데이 2013.04.28 02:03 320호 24면 지면보기
허버트 애스퀴스(1852~1928년) 총리의 초상(제임스 거스리 작, 연도 미상) [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
허버트 애스퀴스(1852~1928년)는 영국의 국력이 최전성기를 구가한 1908년 총리를 맡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거릿 대처가 1988년 기록을 깨기 이전까지는 역대 최장수 총리였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세계 패권이 이동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되살아난 강국, 영국의 리더십 ② 허버트 애스퀴스

애스퀴스는 자수성가형 인물이었지만 정치 우등생이었다. 네 살 때 중산층 의류업자인 아버지를 여의고 병약한 어머니와 함께 외할아버지와 삼촌 집에서 자랐다. 런던의 명문 사립학교인 시티오브런던을 마치고 옥스퍼드대에 들어가 학생회장을 지냈다. 대학 졸업 뒤 변호사로 활동하다 34세에 자유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했다.

그는 자유무역, 사회개혁, 아일랜드 자치를 신봉했다. 자유당의 이념과 딱 들어맞았다. 1895년 야인 시절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연설회를 열었을 정도다. 산뜻한 외모의 작고 옹골찬 사나이라는 이미지와 연설 능력을 자랑하며 일찍부터 의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87년 3월 24일 초선 의원으로서 의회 첫 연설을 마치자 당 대표인 윌리엄 글래드스턴(1809~1898)이 그를 불러 격려했다. 초선의 젊은 애스퀴스가 가진 잠재력을 높이 산 것이다. 1892년 자유당이 집권하자 당시 40세인 그는 글래드스턴에 의해 주요 각료인 내무장관에 발탁됐다. 이후 재치와 섬세함, 지성과 담대함에 정열과 헌신성까지 갖춘 인물로 평가받으며 승승장구했다.

1910년 영국 하원에서 발언하고 있는 애스퀴스 총리를 그린 그림. 진지하고 침착했던 면모를 보여준다.
빈곤층 지원 위한 ‘부자 증세’ 밀어붙여
1905년 헨리 캠벌배너먼(1836~1908) 총리 시절엔 내각 2인자인 재무장관을 맡으면서 차기 지도자 수업을 했다. 1908년 총리가 된 그는 시대 흐름을 읽고 식민지 팽창보다 국민생활 향상에 주력했다. 1908년 노령연금법을 제정해 70세 이상의 노인에게 소액이나마 연금을 지급했다. 불로소득에 무거운 세금을 매겨 재원을 확보했다. 세계 최초의 노령연금을 계기로 영국은 사회보장제도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1908년 실업노동자법안, 1909년 직업소개소 설치 법안 등으로 노동자 복지를 강화했다.

애스퀴스의 리더십이 빛나던 시기는 1909년 4월이다. 당시 자유당은 “빈곤의 참상을 근절하기 위한 전비(戰費)”라며 이른바 인민예산으로 불리는 야심찬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노령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 실시와 아울러 당시 신흥세력으로 성장하던 독일과의 군비 경쟁을 위해선 거액의 예산이 필요했다. 문제는 재원 마련 방식이었다. 소득세율과 상속세율을 올리고 누진과세를 강화하는 한편 토지에 거액을 과세하도록 했다.

이에 맞서 보수당과 ‘토지 귀족’이 많은 상원에선 ‘토지 국유화를 노린 사회주의 예산’ ‘부자들의 피를 빨아 먹는 조치’라며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보수당은 인민예산 반대 동맹을 만들어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1904년 자유무역에 대한 신념 때문에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긴 윈스턴 처칠은 ‘찬성 동맹’을 만들어 애스퀴스를 지원했다. 예산안을 둘러싸고 영국은 극심한 분열을 겪었다.

하원을 통과한 인민예산안이 상원에서 부결되자 애스퀴스는 국민의 뜻을 직접 묻겠다고 선언했다. 12월 3일 의회를 해산하고 이듬해 1월 총선을 실시했다. 자유당은 의석을 104석이나 잃었으나 아슬아슬하게 재집권에 성공했다. 인민예산도 아일랜드 국민당과 노동당의 지원을 얻어 통과시킬 수 있었다. 과감한 결단력과 상황 판단, 그리고 다양한 세력과의 합종연횡을 이룬 소통 능력이 빛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애스퀴스는 인민예산 통과에 만족하지 않고 대중적 지지를 발판으로 의회 개혁에 나섰다. 예산·입법과 관련한 하원의 결정에 상원이 비토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회법을 관철시켰다. 투표가 아닌 작위로 임명된 상원 의원들에 대한 하원의 우위를 확고히 한 조치로 평가받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백 명의 새로운 자유당 소속 친(親)개혁 귀족을 양산해 상원에 보내겠다”고 위협해 1911년 상원이 울며 겨자먹기로 스스로의 손발을 묶는 법을 처리하게 했다. 대결과 타협의 절묘한 조화였다.

이후로도 개혁정책을 계속 이어나가며 그는 산업화 시기의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른 국민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했다. 1911년에는 국가보험법을 통과시켜 노동자와 고용주와 국가가 각각 40%, 30%, 20%의 비율로 보험료를 내는 대신 질병이나 실업 때 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실업자가 되면 무상의료 및 직업소개 서비스와 함께 15주간 매주 일정액의 실업수당을 받게 됐다. 제국주의적 식민지 팽창에만 몰두하던 영국이 비로소 국민생활에 눈을 돌려 현대 복지국가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 터졌는데 낙관론 빠져 확전 초래
애스퀴스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였다. 인민예산 파동 때 신흥세력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군함 건조 확대를 원하는 국민의 뜻을 확인했다. 그는 국방비를 줄여 복지 비용으로 돌리려던 계획을 수정해 더 많은 군함을 건조하게 했다. 1890년대 후반부터 세계정책(Weltpolotik)을 기치로 영국의 자유무역과 패권에 도전하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 대항한 정책이다.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애스퀴스 리더십의 핵심을 ‘두고 보기(wait and see)’라는 말로 요약한다.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즉각 반응하지 않고 흘러가는 방향을 조용히 관찰하다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선 뒤에야 대응 행동에 나서는 방식이다. 갈등을 최소화하고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평화 시기에 사회적 논란이 많은 수많은 개혁정책을 펼치는 데 유용한 리더십이었다.

그러나 전쟁 시기에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애스퀴스는 그런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냈다. 1914년 6월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세르비아인에게 암살당하고 그해 8월 4일 그 동맹국인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그는 평화주의자였지만 참전을 결정하고 프랑스에 지원군을 파견했다. 개전 직후 의회를 설득해 모든 입법 논의를 중단하고 대정부 비난을 삼가도록 했다. 의회는 국가 위기 상황 앞에서 정쟁은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며 협조했다. 1915년에 치를 예정이던 총선도 보수당을 설득하고 상원 결의를 끌어내 종전 이후로 연기했다.

문제는 그가 전쟁수행에 필요한 강력한 리더십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 초기에 철도를 국가 관리 하에 두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전시 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심지어 민간기업과 개인의 자유를 가급적 제한하지 않으면서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직업군인인 호레이쇼 키치너 장군에게 전쟁장관을, 자신이 발탁한 젊은 정치인 처칠에게 해군장관을 각각 맡겨 전쟁을 치르도록 했을 뿐 별도의 전시내각을 구성하지 않았다. 독일의 전쟁능력과 야심을 간파하지 못하고 전쟁이 1914년 안에 끝날 것으로 오판한 것이다. 하지만 1915년 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뚜렷해졌다. 침착했던 애스퀴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개전(開戰) 이후 2년간이나 모병제를 유지하다 병력이 부족 사태를 겪었다.

그제야 애스퀴스는 1915년 5월 보수당은 물론 노동당까지 참가하는 대연정을 실시했다. 거국내각에는 7명의 보수당 지도자와 노동당 당수 아서 핸더슨이 입각했다. 전쟁의 한 축인 해군장관 자리를 과감하게 보수당의 아서 발푸어에게 양보했다. 자유당의 핵심정책인 자유무역까지 양보해 사치품 수입을 금지했다. 또 1916년 의회를 설득해 영국 역사상 최초로 징병제 도입을 결정했다.

36세 장남은 최전방 부대 자원했다 전사
1916년 5월 31일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제해권을 지켰으나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프랑스 전선에서는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가 전사했다. 특히 솜 전투에서 그의 장남 레이먼드가 전사했다. 레이먼드는 36세의 나이에 자원 입대한 인물이었다. 소속 부대가 전선에 파견되지 않자 최전방에 있는 부대로 전출을 자원해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숨졌다. 그가 이끌던 대대의 장교 22명 중 생존자는 5명에 불과했다. 총리의 장남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손수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군의 희생이 늘어나도 전황은 풀리지 않았다. 여론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애스퀴스는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우물쭈물하고 망설이다 전쟁을 조기에 끝내지 못한 무능한 총리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트레이드 마크인 ‘두고 보기’ 리더십도 도마에 올랐다.

마침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순간이 닥쳤다. 그는 1916년 11월 자신과 소수의 각료로 전쟁지도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행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보수당에선 이를 보기 좋게 거부했다. 한 달 뒤 그는 당내 2인자인 데이비드 로이드조지에게 총리를 넘겨야 했다. 재무장관 출신인 로이드조지는 군수장관을 거쳐 당시 전쟁담당 국무장관을 맡고 있었다. ‘전시에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격언이 무색해진 셈이다. 애스퀴스의 퇴장은 영국신사 스타일의 조용한 리더십이 끝났음을 말해줬다.

애스퀴스의 또 다른 결점은 여성 권리 확대에 대해 둔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 참정권 반대론자로 유명했다. 1906년 여성참정권협회 회원들이 그의 연설을 여러 차례 방해했을 정도다. 1908년에는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의 유리창이 돌팔매질을 당했고 1912년 아일랜드 더블린 방문 땐 타고 있던 마차가 여성참정권 운동가의 공격을 받았다. 그가 퇴진한 뒤 전시내각은 1918년부터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상원 일부에서 이 법안에 반대했으나 그가 만든 의회법 때문에 상원은 아무런 비토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글 싣는 순서

1 솔즈베리 경(보수당)
고립정책과 점진적 개혁 추진

2 허버트 애스퀴스(1908~16·자유당)
해군 증강과 복지정책 추진

3 데이비드 로이드조지(1916~22·자유당)
1차 대전 승리 이끌고 복지국가 틀 마련

4 네빌 체임벌린(1937~40·보수당)
협상 통해 전쟁 막으려다 실패

5 윈스턴 처칠(1940~45, 1951~55·보수당)
피와 땀과 눈물의 단결 리더십

6 클레멘트 애틀리(1945~51·노동당)
미국과 손 잡은 중도좌파 실용주의

7 헤럴드 맥밀런(1957~63·보수당)
1차 대전에 참전한 노블레스 오블레주

8 해럴드 윌슨(1964~70, 1974~76·노동당)
정적을 각료로 기용하고 경제 회생

9 마거릿 대처(1979~90·보수당)
영국 복지병 치유한 철의 리더십

10 토니 블레어(1997~2007·노동당)
‘쿨 브리태니아’로 창의 리더십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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