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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조 호경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성골장군”

중앙선데이 2013.04.28 02:27 320호 26면 지면보기
개성 송악산 전경. 왕건의 5대조 강충이 술사의 권고를 듣고 삼한 통합 군주 왕건의 탄생을 위해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고 송악산으로 이름을 고쳤다. 사진은 1997년 중앙일보 북한 문화유적 취재 답사단이 송악산을 찾았을 때 촬영한 것이다. [중앙포토]
934년(태조17) 7월 발해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인 수만 명을 데리고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그에게 왕씨 성을 주고 계(繼)라는 이름을 준다. 또한 고려왕실의 족보에 올려 왕족으로 대우한다. 황해도 배천 땅을 주어 거기서 나오는 비용으로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고려사』 권2 세가). 왜 왕건은 이렇게 극진하게 예우했을까? 발해 세자라는 신분 때문일까?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⑥ 왕실의 조상

다른 기록을 보자. 왕건은 후진(後晋:936~946년)에서 온 승려 말라(襪囉)를 통해 후진 고조에게 거란을 함께 공격할 것을 제의한다. 왕건은 “발해는 ‘고려와 친척의 나라(吾親戚之國)’ 또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渤海我婚姻也)’”라면서 그런 발해를 멸망시켜 국왕을 사로잡은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 했다(『자치통감』권 285 後晋紀 開運2년(945)조). 이같이 발해를 ‘혼인’ 혹은 ‘친척’ 관계라 한 것은 이전부터 두 나라가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발해 세자를 극진하게 대접한 것도 단순한 의례용이 아님을 보여준다.

발해국 세자를 이렇게 대접한 것은 고려왕실의 뿌리, 나아가 고려국의 기원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수수께끼 같은 이 문제를 풀어줄 단서는 『고려사』 첫머리에 실린 ‘고려세계(高麗世系)’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 있는 고려왕실의 조상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왕조가 편찬한 공식 역사서에는 항상 이런 기록이 첫머리를 장식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용비어천가 vs 편년통록
우리 역사에서 성군으로 추앙받는 조선 세종은 1438년(세종20)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무도 볼 수 없는 할아버지 이성계의 역사가 담긴 『태조실록』 ‘총서(總書)’를 읽고, 부실한 내용에 불만을 제기한다. 예컨대 1380년(고려 우왕6)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 전투 기록은 당시까지도 생존자와 목격자가 있을 것이니 그 사실을 더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미 완성된 ‘총서’는 어쩔 수 없어 세종은 아예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태조 이성계와 목조(穆祖:李安社-이성계 고조), 익조(翼祖:李行里-증조부), 도조(度祖:李椿-조부), 환조(桓祖:李子春-부친) 등 6명의 행적을 다시 보완한 역사서를 편찬케 한다. ‘해동의 여섯 용이 나시어(海東六龍飛), 하시는 일마다 하늘의 복이시니라(莫非天所扶)’로 시작되는 유명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1447년)는 이렇게 탄생한다. 조선왕조 건국 후 반세기가 넘은 다음의 일이다.

제왕(帝王)이 천하를 통일하면 이같이 그 조상의 지위와 위상을 제왕에 준하여 높이는 의례를 먼저 행한다. 시호(諡號)를 올린다는 말이 그것이다. 가족, 가계와 조상 등 가문의 뿌리를 중시하는 전근대 동아시아 특유의 조상 숭배 의식에서 기원한 것으로, 어느 왕조에서나 매우 중시되는 의례다. 시호와 함께 그에 걸맞게 조상의 행적을 정리하는 ‘뿌리 찾기’도 함께 이루어진다.

고려왕조 역시 그러했다. 왕건은 천하를 통일한 이듬해인 919년(태조2) 3월 증조부모를 각각 시조원덕대왕(始祖元德大王)과 정화왕후(貞和王后), 조부모를 각각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과 원창왕후(元昌王后), 부모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과 위숙왕후(威肅王后)와 같이 3대 조상의 시호를 올렸다(『고려사』 권1). 고려왕실의 조상은 이로써 처음 역사기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조상의 행적은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는지 당시 기록엔 누락되어 있다. 왕건의 가계가 미천했기 때문일까?

왕건은 역산(歷山)에서 농사짓던 중국 순(舜) 임금과 패(沛) 땅의 평민인 한나라 고조(高祖)는 미천한 출신의 인물이지만 덕과 지혜를 가져 제왕이 되었듯이, 자신 또한 그런 처지에서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고려사』 권2 태조 26년(943) 4월). 그의 말은 당시 잘나가는 신라 귀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천하다는 겸사(謙辭)이지, 그 때문에 왕실 조상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고려의 경우 건국 후 250년이 지난 의종(毅宗:1146~1170년 재위) 때 비로소 왕실의 역사가 새롭게 정리된다. 의종은 흔히 술과 연희에 빠진 군주였고, 끝내 보현원이라는 별궁에서 그렇게 즐기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무신들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권력을 잡은 무신들이 그렇게 기록했을 뿐이다. 의종은 문벌귀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들 대신 환관과 측근 무신을 정치 파트너로 삼아 새 정치를 꾀하려 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믿었던 환관과 측근 무신의 손에 쫓겨난 불행한 군주였다. 그렇지만 재위 기간 내내 문벌귀족을 누르고 왕실의 중흥과 왕권의 강화를 꾀하려 한 신성(神聖)군주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유교이념을 통치이념으로 했던 대부분의 군주와는 달리 의종은 불교와 풍수지리·도참사상 등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특이한 캐릭터를 지닌 군주였다. 그는 풍수지리에 따라 왕실의 중흥(重興)을 위해 황해도 토산에 대궐 ‘중흥궐’을 세우고, 태조 왕건이 중시한 서경에서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고, 그곳에 왕실 중흥의 염원을 담은 중흥사를 창건했다. 그는 김관의(金寬毅)라는 역사가에게 고려왕실과 왕조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케 했다. 『편년통록(編年通錄)』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주요한 내용은 『고려사』의 첫머리에 실린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인용되어 있다. 이로써 고려왕실의 뿌리와 고려국의 기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신화와 전설은 역사의 일부
‘고려세계’에는 왕건이 시호를 내린 3대조뿐 아니라 6대조 호경(虎景)과 5대조 강충(康忠)까지 기록되어 있다. 시호를 내릴 당시 3대조인 시조원덕대왕은 4대조가 되고, 대신 당나라 숙종이 3대조로 추가되어 있다.(왕실 세계도 참조)당나라 황실에 혈통을 갖다 붙여 고려왕실을 미화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6대조 호경이 본처를 둔 채 호랑이인 산신과 혼인했는데 몰래 본처와 관계해 강충을 낳았다든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아버지(숙종)를 찾아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닷속에서 용녀를 만나 고려로 돌아왔다는 것도 그런 목적에서 기록된 것이다.

한편 5대조 강충이 부소산(扶蘇山)의 형세는 좋으나 초목이 없으니 이곳에 소나무를 심어 바위를 드러내지 않으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태어난다는 술사의 얘기를 듣고 소나무를 심고 산의 이름을 송악산(松嶽山)으로 고친 설화는 왕건의 등장을 예고한다. 비록 신화와 전설로 윤색된 것이지만, 그 속에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담겨 있다. 그런 생각과 가치관은 곧 역사적 사실과 자료가 된다.

‘고려세계’에서 읽게 될 역사적 사실은 무엇일까? 최초 조상인 호경은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하고, 백두산에서 내려와 두루 유람하여 부소산에 왔다”고 한다. ‘성골’은 신라에서 왕이 될 수 있는 고위 신분인데, 거기에다 장군을 덧붙이고 있다. 맞지 않는 호칭법이다. 그가 신라 귀족 출신이기보다는 당시 지배계급임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송악산, 즉 개경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백두산은 옛 고구려 영토며, 발해 역시 백두산의 동북지역에서 건국했다. 30년을 한 세대로 할 경우 왕건의 6대조 호경이 살던 때는 700년 무렵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699~926년)가 건국되는 시기이다. 발해 건국 이전이라면 호경은 고구려 출신이며, 발해가 건국되었더라도 그는 고구려 출신의 발해인이다.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왕건이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 하고, 그 세자를 극진하게 대접한 까닭은 이같이 ‘고려세계’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고려국의 기원은 고구려와 발해국에서 찾게 된다. 신화와 전설은 문자기록이 변변치 않던 시기에 스토리텔링의 구전(口傳) 형식으로 오랜 기간 전해 내려온 역사의 일부다. 고려 건국 이후 그런 사실이 전해지다가 『편년통록』 편찬 때 채록되어 결국 ‘고려세계’에 남게 된 것이다. 따라서 『편년통록』 이전에 이미 고려왕실에 관한 사실들이 전해 내려온 것이다. 다음의 사실이 그러하다.

지난 호(319호)에 밝힌 대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왕실의 조상이 고구려의 대족이라 했다. 그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고려의 건국을 서술했는데, 그 이전에 먼저 고구려의 역사를 설명한 다음 고구려 멸망 후 걸중상(乞仲象)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발해를 건국한 사실을 서술했다. 그런 후 고구려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을 서술했다. 그런 다음 왕건이 왕위에 오른 사실을 서술했다(『고려도경』 권1 참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서술하고, 그것을 고려 역사의 전사(前史)에 포함시킨 것이다. 결국 고려는 두 나라에서 기원했고, 그들의 역사를 계승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짧은 체류기간 그가 서술한 고려역사는 자신의 지식이 아니라 당시 고려로부터 얻은 역사지식에 근거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술 속에는 당시 고려인의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역사인식이 의종 때 편찬된 『편년통록』에 또한 반영되어 있다. 고려왕실과 고려국의 기원은 이같이 의종 때 창작된 게 아니라 오랫동안 전승된 것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왕건이 발해를 ‘혼인’ ‘친척’의 나라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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